▲ 이영로씨를 통해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에게 비 자금을 건넨 손길승 SK그룹 회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사건이 터진 이후 이영로라는 인물이 정·재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검찰이 지난 14일 “최도술 전 비서관이 손길승 SK그룹 회장으로부터 11억원 상당의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받는 과정에 이영로씨가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고 밝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최도술 전 비서관의 부산상고 선배라는 정도가 전부다. 이씨는 부산상고 45회로 노 대통령(53회)과 최 전 비서관(54회)보다 8∼9년 선배. 이씨는 최 전 비서관을 지난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처음 알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대선 직후에는 급기야 ‘대형사고’까지 치고 만 셈이다.
이씨는 손길승 SK그룹 회장과 같은 경남 하동 출신이다. 올해 63세로 손 회장보다 한 살 위인 그는 손 회장의 초등학교(하동 소재 봉래초등학교) 선배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지난 9월14일부터 부산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부산대 병원측은 “이씨는 현재 제대로 말도 못할 정도로 반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고 전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정체는 그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씨의 주변 인사들은 그를 가리켜 ‘재력가’라고 불렀다. 그중 몇몇 인사들은 그의 재력과 관련해 “한꺼번에 현금을 1천억원까지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정체는 검찰이 지난 15일 서울지법에 청구한 최도술 전 비서관의 구속영장을 통해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 전 비서관의 구속영장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최 전 비서관은 이씨와 함께 민주당의 부산 선거운동캠프 활동과정에서 누적된 빚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논의했다. 이때 SK그룹 손길승 회장이 이씨의 고향 후배로 이씨와 친하고, SK그룹의 기업활동과 관련해 문제가 생길 경우 정부 관계부처에 부탁해 협조하거나 지원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손 회장에게 채무 해결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그리고 며칠 후인 지난해 12월19일 저녁에 부산 장전동에 있는 D횟집에서 이씨는 손 회장에게 “이번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진 빚을 갚으려면 1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며 “이를 도와주면 향후 새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에서 SK그룹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 잘 해결되도록 해 주겠다”는 취지로 자금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손 회장이 받아들였다고 검찰은 밝혔다.
그리고 이씨는 다음날인 그해 12월20일 손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한 돈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갈 때 민주당 부산캠프에서 살림살이를 했던 최도술과 함께 가겠다”며 “최도술을 알아두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탁한 돈을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CD)로 마련해주면, SK에서 회계처리할 수 있도록 연구비 명목의 영수증을 준비해주겠다”고 손 회장에게 말했다.
그리고 노무현 당선자의 아들인 건호씨가 결혼한 지난해 12월25일 저녁 6시30분께 서울 프라자호텔 일식당에서 손 회장과 만나 액면 1억원짜리 CD 11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피의자들이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CD로 자금지원을 요청했고, SK그룹은 현금을 비자금으로 조성, 임직원들의 차명으로 CD를 구입한 뒤 이를 제3자인 이씨의 부인 배아무개씨 명의의 통장에 입금했으며 돈 세탁을 거친 후 현금과 수표로 인출해서 사용하는 등 범행을 은폐하려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씨는 검찰에서 “CD를 받아 이영로씨와 돈을 나누어 사용한 사실은 인정한다”면서도 “이씨와 공모한 사실이 없으며 이씨의 단독범행”이라며 공모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검찰은 “최 전 비서관은 범행을 공모한 이씨가 현재 뇌경색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이번 사건을 이씨의 단독 범행으로 덮어씌우고 있다”고 밝혔다.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현재 이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어 최 전 비서관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할 경우 혐의 입증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될 경우 이씨가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는 게 검찰측 설명.
▲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은 이영로씨와 공모한 사 실에 대해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는 “앞으로 6개월 정도 더 입원 치료를 받으면 호전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퇴원을 해도 인지 능력과 도보 능력 등이 떨어져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부산대병원은 감염을 우려해 현재 이씨의 병실에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가족들도 하루에 30분씩 두 차례만 면회가 가능하다고 병원측은 전했다. 면회시간에는 주로 부인과 딸이 이씨를 면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말없이’ 병상에 누워 있는 이영로씨의 주변에 따르면 이씨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지만 어린 시절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토박이’나 마찬가지. 그는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금융계에서 사회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부산은행에 입행한 그는 국제금융부장까지 올랐다가, 지난 78년에 퇴사했다. 이후 동남은행 비상임 이사를 맡기도 했다.
그는 은행을 나온 뒤 사업가로 변신했다. 동국제강으로부터 고철 수집권을 따내는 등 사업수완을 발휘, 제법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부산지역의 모 백화점 등 기업의 인수·합병(M&A)사업에도 손을 대 큰돈을 모아, 경남은행과 동해종금 등 금융기관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부산 지역에서는 이씨가 5백억∼1천억원대의 자금 동원력할 수 있는 ‘큰손’으로 소문나 있으며, 현재 부산에서 초밥집과 농원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의 한 주변 관계자는 “이씨가 재력가이지만, 현금 동원력이 많다기보다는 부동산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 부산상고 동문을 중심으로 선거자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를 잘 아는 한 부산상고 출신 인사는 “이씨가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과 대선에서 선거운동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는 외부로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특히 이 인사는 이씨의 당시 활동에 대해 “동문들이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자금을 모았으며, 이씨가 조직적으로 선거자금을 모으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씨가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자금 책임자였다는 소문을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
이씨는 한때 부산상고 총동창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래서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현재 총동창회 회장을 맡고 있는 신상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게 연락해 이씨에 대해 질문했으나, 신 부의장측 관계자는 “부의장님은 이영로씨와 친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부의장님은 이씨와 가깝다는 소문이 나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해한다”고 말했다. 이씨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익명을 요구한 부산상고 총동창회의 한 관계자는 “이영로 동문은 선후배들 사이에서 원만한 사람으로 통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툭 불거지거나 주변과 등을 지는 극단적 행동을 하지 않는 평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가 전하는 ‘동문 이영로’에 대한 견해를 좀더 들어보자. “이 동문은 90년대 초반에 45회 회장 겸 동창회 부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선배들로부터는 ‘원만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아집을 부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주로 경청하는 편이었다. 또 후배들에게도 존경받는 선배였다. 왜냐하면 그는 동문들의 길흉사를 잘 챙겨줬고, 동문 행사에서도 전면에 나서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얼굴 정도는 내밀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선거운동을 할 때도 이 동문은 노무현 동문의 당선을 돕기 위해 나름대로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다. 우리(총동창회)는 지난해 선거 때 누구 한 사람이 나서서 선거운동을 주도하지는 않았다. 동문들이 알아서 선거운동을 했고, 이 동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난해 초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부산 유세장에서 이 동문을 두 번 정도 만났다. 그렇지만 그는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고 등산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동창회 행사에 얼굴을 내밀기는 했지만, 특별히 나서서 하는 일은 없었다.”
대개의 경우 ‘동문’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알고 지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9년이나 차이나는 선후배가 가깝게 지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법. 그래서 이씨와 최 전 비서관이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이에 대해 부산상고의 또 다른 동문은 “이영로 동문과 최도술 동문이 같은 학교 출신이긴 했지만, 지난해 대선 경선 과정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번에 신문에 기사가 난 다음에서야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된 동문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