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영 명예회장의 현대그룹 인수 선언과 이에 반대하는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의 ''국민기업화 선언''이 재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14일 KCC그룹 정종순 부회장 등 전문경영인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현대그룹 인수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자 현정은 회장은 17일 전격적으로 현대엘리베이터를 국민기업화시키겠다고 선언했다.시숙의 경영간섭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것.
재계에선 지난 8월 정몽헌 회장이 사망한 직후부터 현대그룹의 경영권이 어떻게 될 것이냐에 큰 관심을 표명했다. 고 정몽헌 회장의 유족으로는 1남2녀가 있지만 경영일선에 나설 인물이 없다. 현 회장조차도 정몽헌 회장 사후에야 경영수업을 받고 있을 정도
▲ 지난 14일 KCC의 김문성 상무, 정종순 부회장, 고주석 사장(왼쪽부터)이 현대그룹 인수를 공식 발표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 ||
이 틈을 비집고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등장했다. 정 명예회장은 외부 세력의 현대그룹 인수기도를 저지하겠다며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사들였다. 그는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매집에 나설 당시 ‘현대그룹을 외곽에서 섭정하겠다’는 정도의 의견만 내비쳤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외곽 섭정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를 더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지난 14일 현대그룹 인수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자 ‘현대그룹 회장’임을 선언한 현 회장은 “현대그룹이 타 그룹에 편입돼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증자(1천만 주)를 통해 현대엘리베이터를 국민기업화하겠다”는 초강경 대응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되자 일각에서는 지난 2000년 그룹의 후계구도를 놓고 벌어졌던 ‘왕자의 난’에 버금가는 ‘숙질의 난’이 현대그룹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오가고 있다. 이 사태를 두고 일부에선 ‘계유정란’(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권을 찬탈한 난)에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KCC그룹에선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KCC측은 ‘경영권 방어가 아니라 장악이 아니냐’는 질문에 “현대그룹의 과거 지분구조로는 다른 국내외 M&A 세력에 의해 경영권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에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지분확보에 나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범 현대가의 일원으로서 현대그룹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방어한 것이라는 얘기.
그렇다면 왜 정상영 명예회장이 나선 것일까. 일단 정상영 명예회장의 뜻은 지난 9일 배포된 보도자료에서 처음으로 공식화됐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KCC의 입장’이란 자료에서 “현대가의 개인 주주 및 회사가 뜻을 같이해 국내외 자본으로부터 현대그룹을 보호하기 위한 경영권 방어 조치로서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을 취득한 것”이라고 밝혔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KCC는 과거 고 정주영 회장 시절의 현대그룹과는 별개로 독립경영을 해왔다. 그러나 막내 동생으로, 정 회장을 부모처럼 섬겼고 고인의 유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고 정몽헌 회장의 타계로 손위 형제들이나 조카들 중에서도 항상 현대가의 조정자 위치에 서서 그룹의 장래를 굳건히 해온 그간의 입장과 부응한다”며 자신이 현대그룹의 후원자로 나서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KCC에선 정 명예회장이 “고 정몽헌 회장 재임시에도 든든한 지원자로 역할했으며, 특히 고인이 대주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차입까지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사재인 KCC 주식까지 담보로 제공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몽헌 회장의 사망 직후인 지난 8월 초 정몽헌 회장의 서울 성북동 자택이 지난 2002년 3월 정상영 명예회장 앞으로 근저당 설정됐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정 명예회장은 조카인 정몽헌 회장이 금융회사로부터 빚 상환압력을 받자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것이다.
▲ 정몽진 KCC 회장 | ||
정상영 명예회장은 언론 노출을 극도로 기피해온 인물. 다만 지난 2000년 출간된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회고록을 보면 정상영 명예회장이 형제간에 어떤 인물로 통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현대자동차 초기인 지난 70년 현대자동차는 할부판매한 차 대금이 회수되지 않아 엄청난 자금압박에 시달렸다. 이때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정상영 명예회장이다. 정 명예회장은 70년 말부터 73년까지 현대차의 연체금을 해소한 뒤 다시 자신의 사업체인 금강슬레이트(현 금강고려화학)로 돌아갔다.
정 명예회장이 정씨 집안의 해결사 노릇을 한 게 적어도 30년 이상된 셈이다. 이런 정상영 명예회장을 가리켜 손위 형인 정세영 명예회장은 “체구는 작아도 강단있는 장사의 천재”라고 평했다.
실제로 정 명예회장은 갓 스물을 넘긴 시절부터 학업보다는 사업에 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이력서에는 지난 61년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건설회사를 하던 큰형(정주영)의 영향을 받아 벽돌공장(금강슬레이트)을 세웠다. 그가 사업에 뛰어든 것은 지난 59년의 일이었다.
정주영 회장을 부모보다 어려워하는 것은 형제들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 중 자신의 손으로 창업하고 독립 경영에 나선 사람은 정상영 회장이 유일하다. 물론 그의 사업체도 대부분 현대그룹의 수혜를 받았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사업에 남다른 재질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는 정주영 회장도 생전에 인정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자신보다 스물한 살이나 어린 ‘동생 정상영’의 배포와 재주를 누구보다 아끼고 챙겼다. 정상영 명예회장 역시 평소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정주영 회장을 꼽았다.
KCC에선 정상영 명예회장이 말투나 걸음걸이,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 두둑한 배짱 등이 정주영 명예회장을 빼닮았다며 그를 ‘리틀 정주영’이라고 불렀다. 현대가에서 ‘정주영 닮았다’란 표현은 최대의 찬사나 다름없었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배짱만 두둑한 것은 아니다. KCC는 소리나지 않게 부를 축적하고 상속에도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주주 지분 정보제공업체인 미디어에퀴터블의 조사에 의하면 정상영 명예회장 일가는 지난해 2월 기준으로 국내 4위의 부호가문으로 조사됐다.
부동산을 뺀 주식과 채권, 미술품 등의 재산만 추정한 결과 정 명예회장 일가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가에 이어 국내 4위에 랭크된 것. 정 명예회장 일가의 추정 재산은 5천억원으로 평가됐다.
이는 조카인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이나 정몽근 현대백화점,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부를 능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배짱과 사업감각까지 타고난 정 명예회장이 3백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현대그룹을 인수한 것이 단순한 의협심에서인지, KCC그룹의 몸집불리기를 통한 공격경영의 일환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이런 와중에 일각에선 정 명예회장이 후계구도와 관련해 현대상선을 인수한 것이라는 구체적인 얘기도 나돌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슬하에 아들만 셋을 뒀다. 막내아들인 정몽렬씨는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의 사장을 맡아 사실상 분가 예비 수순에 들어섰고, 큰 아들인 정몽진씨는 주력사인 금강고려화학의 회장, 둘째 아들인 정몽익씨는 금강고려화학의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재계에선 정몽진 회장에 대한 지분 상속구도도 사실상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둘째 아들에게 어느 부분을 물려줄 것이냐 하는 부분. 이와 관련 이번에 현대그룹을 인수하면서 현대상선을 차남에게 넘길 것이라는 예상도 오가고 있다.
사실 차남 정몽익 부사장은 해운업과 깊은 인연이 있다. 한진해운의 조수호 회장(조중훈 회장의 삼남)과 그는 동서지간이다. 정 부사장의 부인 최은정씨는 최현열 엔케이그룹 회장의 둘째딸. 최 회장의 장녀 최은영씨는 조수호 회장의 부인이다.
이번에 KCC가 현대그룹을 인수한 뒤 정몽익 부사장이 평소 해운업에 관심이 많았다는 얘기도 그런 맥락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선 정 부사장이 이번 주식매집을 진두지휘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다. KCC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매입은 정 명예회장이 주도했지만 정 부사장도 현대그룹 인수 TF팀을 비공식적으로 운용하는 등 막후에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관심을 끄는 부분은 KCC측이 현대상선 지분의 일정 규모를 사들였다는 점이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상선 지분 6.93%를 확보해 현대엘리베이터(15%)와 현대건설(8%)에 이어 3대주주로 올라선 것. 이를 고리로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상선의 주식을 스와핑(주식 맞교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해석이 나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정 명예회장이 갖고 있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과 사돈인 김문희씨가 갖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을 맞교환해 정 명예회장은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현대그룹을 재편하고 현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를 경영하는 구도가 가능하다는 분석인 것이다.
어쨌든 현재 구도대로 KCC가 현대그룹을 운영할 경우 정 부사장이 현대상선의 경영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현대 안팎에서는 보고 있다.
30년 전부터 현대 정씨 가문의 해결사로 활약해 온 정상영 명예회장이 이번에도 외풍에 노출된 현대그룹 본가의 해결사 노릇에 만족해 할지, 아니면 현대그룹의 경영권 혼미를 틈타 KCC의 몸집을 불리고 후계구도까지 완성하는 이른바 ‘수양대군의 난’을 일으킨 것인지는 두고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