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법 대선자금과 관련, 검찰의 타깃이 된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은 ‘이건희 시대’ 삼성호 항해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주역이다. | ||
삼성그룹 비서실장의 맥을 잇는 인물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하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거나, 기업의 전면에 나서 일선경영을 진두지휘한 스타경영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은 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비서실장(이학수씨는 구조조정본부장이다)으로 재직할 때 삼성그룹을 사실상 주물렀거나 지금도 주무르고 있다. 여느 그룹과 달리 삼성그룹의 비서실장은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다. 이들 비서실장의 공통점은 재무통이라는 점이다. ‘관리의 삼성’ 시대를 이끈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함 삼성호의 항해를 주도했다. 그런 만큼 그들에게는 부와 명예, 그리고 영광이 주어졌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는 가시방석이 되고 있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삼성그룹으로 향하면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첫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삼성그룹의 2인자이자 이건희 회장의 ‘복심’인 이학수 본부장. 그는 이건희 회장 일가와 삼성의 모든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기에 오히려 우환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알려진 대로 삼성 비서실 재무팀에서 이 회장 일가의 재산관리도 했었고, 삼성그룹의 재무를 관할하기도 했다. 지금은 비서실 재무팀을 넘어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으로 인사, 재무, 전략, 기획 등 전방위를 책임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복심으로 불리는 그는 ‘그림자 참모론’을 주창해온 인물이다. 표면에 나서지 않지만, 회장이 화두를 던지면 그에 걸맞은 모든 플랜을 내놓는 게 바로 구조본에서 하는 일이다.
이 본부장은 올 초 단행된 그룹인사에서 사장직에서 부회장직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뚜껑을 연 결과 그는 승진하지 않았다. 삼성그룹은 “본인이 강력 고사했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그룹에는 회장은 이건희 회장만 있고, 그 밑에 부회장으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서너 명이 있다. 직급으로 보면 사장급인 이 본부장의 서열은 랭킹 10위에 겨우 낄 정도. 하지만 그룹 내에서는 그를 이건희 회장 부자를 제외한 으뜸 실세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그로선 부회장 승진이 별 의미없는 요식행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승진도 마다하는 실세. 이학수 본부장은 삼성그룹에서 바로 그런 인물이다.
이 본부장은 경남 밀양 태생으로 부산상고,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지난 71년 1월 삼성그룹 공채로 제일모직 경리팀에 입사했다. 제일모직 경리팀은 삼성그룹의 인재 양성소. 제일모직 경리팀을 거쳐 비서실(현재의 구조본)로 발탁되는 것이 삼성그룹의 전형적인 승진코스로 꼽혀왔다.
경리팀은 삼성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오너에 대한 충성심이 요구되는 파트로 꼽힌다. 기업의 비밀과 오너의 요구를 잘 알고, 이에 따라 일해야 하기 때문. 재계에서는 삼성그룹의 성장 배경에는 경리통 출신 인물들이 회사 주요 포스트에 배치돼 주도권을 잡고 있는 부분도 있다고 분석한다.
이 본부장은 입사 초기 아무 연고도 없던 제일모직 대구공장에 자원, 그곳에서 모방직 업계의 원가 분석 시스템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개발하는 등 현장에서 커 나갔다. 이 공로로 그는 과장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이 회사의 부장을 끝으로 82년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에 처음 합류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가 열린 것은 이건희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87년 이후였다. 그가 비서실에 합류했을 당시에는 이병철 회장-소병해 비서실장 시대였다. 비서실에 합류할 당시 그는 재무팀에서 일했다.
재무팀장급(이사)으로 승진한 이 본부장은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면서 이건희 회장-이학수 비서실장 시대를 열었다. 이학수 본부장이 재계에 그의 파워를 알린 사건은 자동차 사업진출과 사업포기, 그리고 그 뒤처리 과정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그가 단순히 이건희 회장의 복심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경영자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삼성그룹의 자동차사업은 94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자동차사업 진출문제로 비서실 전략기획팀과 재무팀은 초반부터 맞붙었다. 지승림 당시 비서실 상무와 이필곤 21세기 기획본부장 등은 삼성그룹의 신수종사업으로 자동차사업을 적극 추진했고, 이 본부장은 그 반대편에 섰다.
그러나 초기엔 이 본부장이 패배했다. 그는 자동차사업 진출 여부로 논란이 진행중이던 지난 94년 10월 갑자기 제일제당 사장으로 파견됐다. 계열분리 문제로 이재현 당시 제일제당 부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갈등이 불거지자 그를 해결사로 보낸 것.
그러나 그가 없는 재무팀은 자동차 사업 진출을 서두르는 전략기획팀에 밀렸다. 이런 상황도 이 본부장이 제일제당에서 삼성화재로 복귀한 뒤부터 달라졌다. 당시 삼성은 자동차사업 우회진출 방안으로 쌍용자동차 인수를 추진했다. 이 회장과 김석원 쌍용 회장 간에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다.
하지만 재무팀에서 쌍용의 노조문제와 과도한 부채를 문제삼아 극력 반대했다. 결국 이 회장은 비서실 재무팀의 의견을 받아들여 없던 일로 했다. 이후 90년대 말 기아차가 부도나자 전략기획팀에선 기아차 인수를 추진했다.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기아차를 인수해야 한다는 전략팀(지승림)과 대폭적인 부채탕감이 먼저 이뤄져야 인수할 수 있다는 재무팀(이학수)이 또 맞붙었다. 결과적으로 기아차 인수는 무산되고, 삼성은 자동차사업을 포기했다. 그 결과 전략팀 인맥들이 대거 삼성그룹을 떠났다. 이 본부장은 이 과정을 통해 삼성그룹 내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우뚝서게 됐다.
그가 삼성그룹 내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두 가지 일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최근 삼성그룹 직원들이 그룹 실세를 평가하는 설문조사가 공개된 적이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1위는 이건희 회장, 2위는 이재용 상무였다. 오너 부자가 1, 2위를 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 순위. 그룹 기획실이라 할 수 있는 구조본부장인 이학수 사장이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누르고 3위를 차지한 것은 삼성 내부에서 이 사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입증하는 흥미로운 결과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일화는 지난 94년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주창하고 나설 때의 일. 당시 이 회장은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임원들을 신경영에 걸맞은 소양을 갖출 수 있게끔 용인 삼성 연수원에 6개월 이상 교육을 보냈다. 현업을 떠나 연수발령을 받는 것에 대해 임원들은 ‘권고사직 신호’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러자 이 회장이 “이학수도 보내니 걱정말라”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 회장의 최측근인 이 본부장도 받는 교육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실장이 교육을 마친 뒤 본격적인 신경영에 나선 것은 당연했다.
자동차사업 포기 이후 안정됐던 이학수 구조본부장 체제를 위협하는 최대의 위협은 외부에서 찾아왔다. 지난해 대선에서 이 본부장의 고등학교 1년 후배인 노무현 후보가 대선 후보로 나서면서 그의 이름이 정계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노 후보가 국회 청문회에서 스타가 된 이후 이 본부장과 교분이 있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림자 참모론’을 주창하는 그로선 부담스러운 정치권 인사와의 ‘인연’이 껄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대선을 앞둔 10월부터 그룹 안팎에서는 이 본부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업무부담이 덜한 계열사 사장으로 나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실 이 본부장은 위가 안좋아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 지난 8월5일 이학수 본부장(왼쪽 고개 숙인 이)이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맨왼쪽)의 모습도 보인다. | ||
이런 오너의 신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충성심은 삼성그룹 내부에서도 인정한다. 지난 90년대 중반 이건희가와 이맹희가가 재산분할을 할 당시의 일화는 두 사람의 신뢰관계를 잘 보여준다.
지난 94년 10월 이학수 당시 부사장은 비서실에서 삼성화재 부사장으로 발령났다가, 곧바로 제일제당 대표이사로 발령났다. 그러자 이재현 일가에선 이 같은 조치에 극력 반대했다. 후에 이 갈등은 ‘이재현 회장 자택에 대한 비디오 감시사건’으로 불거지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제일제당이 주장했던 내용의 핵심은 이학수 사장이 이 회장의 대리인으로 ‘제일제당이 갖고 있는 부동산과 삼성생명, 삼성전자 주식을 정리하기 위해 파견됐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사장은 곧바로 삼성화재로 복귀했다.
결과야 어찌됐건 이건희가의 가장 큰 두통거리였던 이맹희가와의 갈등 최전선에 이 본부장이 투입됐다는 것은 이 회장이 이 본부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이후 이 본부장은 고비 때마다 궂은 역을 마다 않고 직접 뛰어들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사업 포기나 ‘생명보험사의 상장 차익은 주주 몫’이라는 삼성생명의 상장 원칙에 대한 삼성그룹 입장도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그룹 회장이 직접 말하기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 그가 입장을 정리했다.
이 본부장은 지난 96년 8월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차장으로 비서실에 재입성했다. 이어 97년 1월 이 본부장이 실장(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이 본부장 시대가 공식 개막했다.
이후 이 본부장은 삼성그룹 대내외 업무를 총괄하는 전문 경영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단순히 재무팀장이 아닌 구조본 사장으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했던 것. 이 본부장은 외부에 조용조용한 말투와 섬세한 표정관리를 하는 전문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 98년 재벌그룹 간에 빅딜론이 나왔을 때 당시 이학수 본부장과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던 김태구 사장이 한 호텔에서 고성을 치며 격론을 벌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론이 불거졌을 때 ‘처녀-과부론’으로 재계의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삼성자동차는 모든 상황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대우전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과부’ 같은 회사여서 맞교환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던 것.
삼성의 자동차 사업 포기를 그룹 내에 관철시킨 그는 99년 7월 포기 논리를 사내 방송을 통해 직접 해명했다. 이 회장 대신 그가 부담을 떠안은 것.
궂은 일이 있을 때 이 본부장의 역할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 물론 그가 충성심만으로 최고 재벌 그룹의 2인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냉철한 판단력도 갖추고 있다. 삼성차 포기 건도 그룹 전반을 염두에 둔 그의 냉정함과 재무면에서 보수적인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예다.
삼성 안팎에서 또다른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몇 년 전 이 본부장과 동창 관계인 한 임원이 퇴사할 무렵 그가 ‘손을 쓸 수 있는 자리에 있었음에도 냉정하게 처리했다’는 게 삼성 내부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는 그가 역설적으로 총수 관련 사항을 빼고는 원칙대로 임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학수 본부장은 삼성의 정치 자금 제공과 이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상무에 대한 상속 구도, 구조본이 주도했던 e삼성 프로젝트에서 모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이 모든 거대한 비밀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이 본부장의 행보에 재계와 관계, 정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