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열린우리당(우리당) 의원이 최근 기자간담회 때 꺼냈던 말이다. ‘반장’이나 ‘간사’ 등 한 조직의 ‘수장’을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다는 그가 지난 11일 마침내 ‘여당’의 당 의장에 등극, ‘꿈’ 하나를 이뤘다.
이날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우리당 전당대회에서 정 의원은 전체 대의원 1만1천1백3명 가운데 8천3백38명이 투표에 참가한 경선에서 5천3백7표(63.65%)를 얻어 ‘우리호의 선장’에 취임했다. 정 의장의 올해 나이 51세. 야당 대표들이 60대인 점을 감안하면, ‘젊디 젊은’ 대표인 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 의장’으로 신분상승한 11일은 정 의장이 정계에 입문한 지 정확히 만 8년이 되는 ‘기념일’이기도 했다. 전례를 찾기 힘든 이 같은 ‘고속성장’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그의 정치 이력부터 살펴보자.
정 의장은 MBC뉴스 앵커였던 지난 1996년 1월11일 새정치국민회의(옛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해 15대 총선 때 전주 덕진에서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했고, 연달아 재선에도 성공했다. 2000년에는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47세의 나이로 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정 의장은 2001년 5월,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 면전에서 권노갑 고문 등 ‘동교동계 2선 후퇴론’을 제기하면서 ‘정풍·쇄신 운동’을 주도, ‘반동교동계의 대표 인물’로 급부상했다.
2002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으나, ‘대망의 꿈’은 후일로 미뤄야 했다. 대선 이후 그는 천정배·신기남 의원 등과 함께 신당 창당을 주도했고, 지난해 11월 열린우리당의 ‘주주’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당 의장에 올라선 것이다.
개인적 지명도에 비해 정치 경력이 짧아 ‘리더십이 검증되지 않은 정치인’으로 머물러야 했던 그는 여러 정파가 경합한 이번 당 의장 경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나름대로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마련한 상태다.
하지만 그의 앞길에는 ‘태산준령’과도 같은 또 하나의 험난한 관문이 놓여 있다. 눈앞에 다가온 4·15총선은 그에게 디딤돌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깊은 내상을 입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당선 일성으로 “우리당을 제1당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한 정 의장. 그는 과연 ‘우리 호’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지난 11일 우리당 전당대회장에서 만난 몇몇 대의원들은 “2002년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을 때보다 정 의원의 연설솜씨가 훨씬 세련됐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의 말을 듣다 보면 나도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고 털어놓은 다른 경선 후보도 있었다. 대중정치인으로서의 정동영의 타고난 자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지난 12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상임중앙위원회의에 참석해 활짝 웃고 있다. 정치개혁을 줄곧 외쳐온 그의 지도력은 4·15총선을 통해 검증받게 될 것이다. | ||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던 정 의장도 이제 50대로 접어들었지만, 솔직히 그의 ‘지도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까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에게 이번 의장 취임은 또 하나의 기회이자 시험이기도 하다. 비록 원내 의석 수는 47석으로 ‘제3당’이지만, ‘실질적인 여당’의 대표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정치 지도력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 특히 90여 일 앞으로 다가온 4·15총선은 그의 비상과 추락을 결정지을 최대 관문이 될 전망이다.
당 내부에도 정 의장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당장 이번 당 의장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한 신기남 상임중앙위원 등 ‘개혁 강경파’가 당 지도부를 구성함에 따라 당 중진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에 관심이 쏠린다.
이에 대해 정 의장은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이겠다는 자세다. 그는 “선배들의 도움이 없이 당 화합과 전진은 어렵다. 도와줄 것으로 기대한다. 매사를 상의하겠다. 난 사실 당 운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선배들로부터 경륜과 지혜를 전수받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당이 창당한 이후 지지율이 답보상태를 보이자, 당 일각에선 “총선까지 이대로 갔다간 우리당이나 민주당은 한나라당에게 참패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민주당과 재통합해야 한다” “연합공천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 의장은 이에 대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짓는다. 민주당과의 재통합이나 연합공천에 관한 그의 생각을 좀더 들어보자.
“새해 들어 우리당 내에서는 민주당과의 통합 문제 얘기가 안 나왔다. 언론에서만 간헐적으로 흘러나온 얘기일 뿐이다. 내 생각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양당 모두 2백27개 지구당에서 공천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민주당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민주당이 잘못 가고 있다. 정치관계법 개정과 관련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야합하고 있는데 불행한 일이다. 한-민 공조노선에 문제가 있다. 민주당은 빨리 발을 빼고, 우리당과 정치개혁으로 경쟁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 의장이 심중에 두고 있는 이번 총선의 전략은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정 의장은 한때 ‘형제당’이라고까지 말했던 민주당을 배제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우리당은 한나라당과 1 대 1 대결구도 전략으로 나갈 것이다. 한나라당과의 차별화가 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책이다”며 “우리가 정치개혁 노선을 분명히 하고 바른 정치의 길로 신념을 갖고 달려가면 민심은 우리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 의석(1백48석)과 우리당 의석(47석) 수를 바꿔치기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이를 위해 정 의장은 정가에서 일고 있는 ‘물갈이론’ ‘세대교체론’을 적극 수용할 태세다. 아니 더 나아가 정치판을 새로 짜는 ‘판갈이론’까지 내놓고 있다. 판 자체가 오염돼 있으면 아무리 새 물을 넣어도 금세 물들고 마니 아예 새 판을 짜야 한다는 것.
물론 정치판을 바꾸기 위해선 제도 개혁이 필요하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선 힘 있는 여당이 되어야 한다는 게 정 의장의 논리다. 그가 4·15총선에 정치적 명운을 걸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정 의장은 특히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을 대상으로 한 ‘총선 징발론’에 대해서도 확고한 지지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인사들을 많이 모셔와야 당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며 “그런 점에서 지금 내각에는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인사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을 영입했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현재 인기 상종가를 치고 있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 등을 ‘징발’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오른쪽)이 지난 12일 열린우리당 당사를 방문해 정동영 신임 의장의 취임을 축하하며 악수를 나누고 있다. | ||
정 의장에겐 처음 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줄곧 외쳐왔던 구호가 있다. 바로 ‘정치개혁’이다. 그가 최근 내놓은 ‘판갈이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당 의장으로 선출된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도 정 의장은 “불법정치자금 문제를 막기 위해선 정치인에게 돈이 들어가는 입구를 투명화해야 한다.
또 돈이 나가는 출구를 좁혀야 한다. 정치인 주머니로부터 일체 돈이 못 나가게 해야 한다. 돈이 안 나가도록 정치인의 기부금 일체를 금지하고, 조화나 축의금, 음식 제공 등을 일절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국회의원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의 3분의 2는 줄일 수 있다”고 역설했다.
정 의장이 정치개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80년대 말 영국 웨일즈대학원에서 유학했을 때의 경험 때문이라는 게 주변사람들의 전언.
부인 민혜경씨는 “우리 가족이 영국에서 생활했을 때 듣고 본 영국의 정치는 우선 돈이 안 들고 깨끗해서 좋았다. 국회의원 선거에 보통 1천만원 정도 들어가면 족하고 평소 지역구 활동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충분했다. 의원세비는 생활비와 활동비로 충당하면 됐다. 과다한 경비를 들여 지구당을 운영하는 것과 경조사 때마다 지역구 의원으로서 물질적인 답례를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 비교하면 영국 정치는 너무 부러운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정 의장과 부인 민씨의 ‘러브스토리’는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 서울대 사학과 재학 시절 부인 민씨가 다니던 숙명여대 기숙사로 찾아가 개나리 꽃다발을 내밀며 구애작전을 펼쳐 결혼에 성공한 까닭에 ‘개나리 아저씨’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정 의장이 ‘진보 성향의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서울대 재학 시절 유신철폐를 주장하다 두 차례 감옥살이를 했고, 군에 강제 징집된 경력이 있기 때문. 선친이 50년대 말 전북도의회 도의원을 지냈으나 젊은 나이로 타계, 홀로 된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한때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한 이색 경력도 지니고 있다.
그가 18년 동안의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96년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대학친구인 이해찬 우리당 의원의 끈질긴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 측근으로도 불렸으나, 지난 2001년 ‘쇄신·정풍 운동’을 주도하면서 ‘동교동계’와 등을 돌렸다.
하지만 정 의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이 성역이었고 그 점에서 역사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햇볕정책’을 발전 계승하겠다”고 천명한 노 대통령의 시각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당의 향후 대북정책의 기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정 의장은 이제 ‘더 큰 꿈’을 향한 행보를 시작했다. 당 의장에 선출된 직후 기자는 내친 김에 그에게 ‘대권 도전에 대한 생각’을 물은 적이 있다. 이 질문에 정 의장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만 답변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의 ‘묵언의 메시지’가 전달하는 의미를 해석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2002년 대권에 도전했고, 또 지난 대선 기간에 노무현 후보로부터 ‘차세대 주자’로 지명됐으며, 이번에 당 의장으로도 선출됐는데 어찌 ‘대망’을 접을 수 있을까.
정 의장은 당 의장 경선 기간 동안 줄기차게 ‘몽골기병론’을 펼쳤다. “몽골이 세계를 제패할 때 인구가 2백만 명이었고, 병력은 겨우 10만∼20만 명이었다. 이것으로 유럽 대규모 병력을 격파했다. 우리당은 의석 수로는 세 번째다. 우리당을 신속한 기동력으로 몽골기병과 같이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과연 이번 총선에서 우리당을 몽골기병처럼 만들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몽골기병이 그의 꿈을 개척하는 첨병이 될 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