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길승 SK그룹 회장과 최태원 SK(주) 회장 | ||
최 회장이 작고한 날, 국민들의 시선은 과연 누가 SK그룹의 대통을 이어갈지에 쏠렸다. 형제가 일군 기업인데다, 4촌형제 간에 한데 어우러져 복잡한 경영구조를 가진 SK그룹의 경영권 향방은 그래서 더욱 관심사였다.
그러나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이 문제는 쉽게 매듭지어졌다. 최종현 회장의 직계인 최태원 SK주식회사 회장이 그룹의 오너십을 이어받고, 최종현 회장의 오랜 심복인 손길승 회장이 그룹경영을, 그리고 최태원 회장의 고종사촌인 표문수 사장이 SK텔레콤(당시 표 사장은 SK텔레콤 부사장이었다)을 맡는 선에서 정리가 됐다.
문제가 됐던 4촌형제들, 특히 그룹창업주인 최종건 전 회장의 직계 2세들은 각자 SKC, SK네트워크 등을 경영하는 선에서 그룹경영에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요동을 칠 것으로 보이던 그룹경영권은 의외로 간단하게 정리가 됐던 것이다.
그러나 손길승-최태원-표문수 3인방으로 이루어졌던 이 경영구도는 출범 5년 만에 와해될 위기에 놓여 있다. 이렇게 되면서 지금 SK그룹은 다시 소용돌이치고 있다.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에서 시작된 경영권 분열은 소버린이라는 외국계펀드의 등장을 초래했고, 이는 결국 이들 3인방의 자리마저 흔들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잇따라 열린 SK그룹 주요 계열사 이사회에서 손길승 회장이 이사진에서 물러났고, 최태원 표문수 두 사람도 등기이사 명단에서 제외되는 충격적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일각에선 3인방이 SK텔레콤 이사진에서 동반 사퇴한 것을 지난해 9월 SK사태의 여파로 구속됐던 최태원 회장이 풀려난 뒤부터 진행돼온 ‘경영진 개편’ 플랜이 현실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영진 개편’ 플랜은 최 회장이 석방 이후 ‘그룹 경영의 주도권을 쥐는 데 너무 안이하게 대응해 SK사태를 불렀다’는 분석과 반성을 했다는 얘기가 퍼져나가면서 SK그룹 안팎에서 세대교체와 지도부 교체라는 말로 바뀌었다.
지난 2월22일 열린 SK(주) 이사회에선 그룹의 간판이자 회장이던 손길승 회장의 퇴진과 황두열 이사, 최 회장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김창근 이사(전 SK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의 퇴진이 기정사실화됐다. 이어 이틀 뒤인 24일 열린 SK텔레콤 이사회에서 최태원, 손길승, 표문수 이사의 퇴진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최태원 회장의 개혁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 와중에 관심을 모으는 것은 최태원 회장과 손길승 회장, 표문수 사장의 엇갈린 행보다. 그룹의 창업 2대 회장이었던 최종현 회장이 98년 급작스럽게 타계한 뒤 그룹 회장은 손길승 회장이,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 회장은 주력사인 SK주식회사의 회장으로, SK그룹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던 초기부터 관여했던 표문수 사장은 SK텔레콤에서 일정한 역할을 인정받으며 경영활동을 펴왔다.
오는 3월 정기주총에서 SK의 간판 경영인 3인 중 최태원 회장만 남고 손길승 회장, 표문수 사장은 물러나는 모양새가 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최태원 회장 단일체제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 표문수 SK텔레콤 사장 | ||
이런 소용돌이속에서 최 회장의 고종사촌이기도 한 표문수 사장은 ‘독립경영’의 기치를 들고 SK주식회사가 연루된 SK사태가 SK텔레콤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 것으로 비쳤다. 때문에 SK그룹 안팎에서 이런 SK그룹의 내부 풍경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일단 화살은 SK그룹에서 오랫동안 전문경영인으로 활동하고 그룹 회장을 지내고 있는 손길승 회장에게 모아졌다. 손 회장의 파워가 ‘단순히 전문경영인을 넘어서는 인맥과 힘을 갖춘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다.
때문에 최 회장이 보석으로 석방된 직후부터 최 회장이 어떻게 내부 교통정리를 할 것이냐가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만큼 누가 SK사태의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뒷말이 많았다.
재계 일각에선 전문경영인으로 그룹 회장 자리에까지 오른 ‘손 회장의 대응이 안이했다’는 얘기도 나왔고, 최 회장이 SK사태를 겪으면서 ‘자신의 위치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룹 장악력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새삼 절감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고, 이는 두 사람의 갈등설로 확대됐다.
물론 최 회장쪽에선 지난 1월 초 손 회장이 구속되자 “손 회장의 자리는 비워둘 것”이라고 말하는 등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지난 2월22일과 2월24일 벌어진 SK(주)와 SK텔레콤의 이사회 결의 내용이 밝혀지면서 ‘인적청산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을 낳고 있다.
최 회장이 ‘군웅할거’ 양상의 SK내부를 최태원 단일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 칼을 뽑았다는 분석이 쏟아졌다. 일단 이번 이사회 멤버 교체 파동의 최종 승자는 최태원 회장이 될 듯하다.
최태원 회장과 함께 SK그룹의 오너십을 나눠 갖고 있는 최신원 SKC 회장 가문에선 아무 얘기도 않고 있다. 중립이라는 얘기다. 때문에 최 회장이 최신원가의 양해를 얻어 이사회 멤버 교체를 시작으로 SK그룹의 내부 인맥지도를 다시 그리는 작업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번 이사회 멤버 교체를 최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했다는 얘기는 최 회장의 최측근에게서 확인됐다. SK주식회사 이사회 직후 최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유정준 SK주식회사 전무가 기자간담회를 통해 “당초 오는 2006년부터 사외이사 비중을 70% 이상 확대하기로 했으나 최 회장이 ‘미룰 것 없이 당장 실시하자’고 제안하고 다른 이사들이 적극 찬성해 2년 앞당겨 전격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무혈진압이 이뤄진 셈이다.
최 회장은 SK 이사회 이틀 뒤인 24일 열린 SK텔레콤 이사회에 직접 참석해 “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패밀리들이 모두 퇴진하기로 했다”고 또 한번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이 승부수는 최 회장의 고모의 아들이자 SK텔레콤의 대표이사인 표문수 사장이 “10년간 SK텔레콤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 회사를 위해 물러나겠다”며 의사 표시를 하고 이사회장을 빠져 나옴으로써 SK그룹 원톱 구조가 굳어졌다.
표 사장의 동반사퇴는 SK그룹 안팎에서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SK텔레콤을 중심으로 이런 저런 잡음도 나오고, SK텔레콤 노조에선 그의 퇴진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해 손 회장은 예상과는 달리 최 회장을 적극 지지하는 전자우편을 SK 전 임직원에 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전자우편은 “과거의 모든 낡고 어두운 구태를 함께 짊어지고 경영일선에서 떠난다. 최 회장을 중심으로 SK가 세운 비전을 이뤄내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으로 손 회장이 최 회장의 그룹 지배구조 개선 방안에 대해 ‘지지’를 보내고 있음을 담고 있다. 일각에서 나돌던 손 회장과 최 회장의 알력설을 부인하는 동시에, 손 회장이 최 회장이 제안한 그룹 지배구조 개선안에 대해 같은 뜻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 손길승 SK그룹 회장과 최태원 SK(주) 회장. 손 회장은 ‘최태원 지지’를 밝히며 물러났다. | ||
표 사장의 SK텔레콤 장악력이 갈수록 커져 최 회장이 이번 기회에 정리한 것이라는 얘기도 그런 맥락에서 나오고 있다. 표 사장은 SK텔레콤 내부에서 ‘오늘의 SK텔레콤을 이룬 인물’이라는 ‘칭송’도 듣고 있다. 하지만 표 사장의 영향력은 손 회장의 그룹 영향력에 비할 수 없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손 회장은 SK그룹 내에는 그의 출신 고교와 동창이거나 동향인 임원이 꽤 있다. 이에 비해 표 사장은 지난 89년 SK그룹 경영기획실 과장으로 입사한 이래 대한텔레콤을 거쳐 오로지 SK텔레콤에서만 일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영향력은 SK텔레콤 내부에만 국한된다. 하지만 그의 내부장악력은 대단하고, 카리스마가 있다는 평이다.
지난해 SK사태가 일어난 후 SK텔레콤에서 방화선을 치는 듯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SK그룹 내부에선 ‘최 회장 따로, 손 회장 따로, SK텔레콤 따로’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표 사장의 경영 실적에 대한 그룹 안팎의 평가가 워낙 좋았던 터이라 그의 이번 퇴진은 의외일 수밖에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사퇴 과정. 일단 SK그룹쪽에선 손 회장이 먼저 ‘그룹 경영에서 빠지겠다’는 표시를 했고, 최 회장이 이를 승낙했으며, 이에 손 회장이 그룹 경영의 일신을 위해 ‘표 사장도 빠지는 게 좋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자, 최 회장이 응낙했다는 것이다. 이는 즉각 표 사장에게 전달됐으며 표 사장도 동의했다는 게 공식발표다.
손 회장은 SK를 살리기 위해서는 SK(주)에 이어 SK텔레콤도 변화하는 모습을 시장에 보여주고 재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점에 대해서 최 회장도 뜻을 같이해 “손 회장과 최 회장이 물러나면서 표 사장과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부사장도 함께 물러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최 부사장은 이사회 발표가 나오자마자 일본행 비행기에 올라 형의 뜻에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표 사장은 달랐다. 표 사장의 퇴진은 최 회장에게 시간이 갈수록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동안 SK텔레콤을 상대로 경제민주화 운동을 펴며 사외이사추천권도 행사했던 참여연대에선 표 사장이 “주주들의 신뢰를 받아온 전문경영인으로서 SK그룹의 불법 부실 경영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그의 이번 동반사퇴 배경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오너가 일방적으로 최고경영자 교체를 통보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구태를 답습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러자 SK쪽에선 표 사장의 퇴진이 밖에서 보기에 급작스러워 보이지만 이미 “최 회장과 표 사장 간에 충분한 대화와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SK쪽에선 “표 사장이 최 회장의 고종사촌이라는 점에서 어쨌든 오너의 인척이기 때문에 그가 이사회에 존재하는 한 계열사 독립경영에 대한 최 회장의 의지가 시장에 안 먹힐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면서 표 사장이 친인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SK쪽에선 그간 “표 사장이 지분도 없는 전문경영인”이라고 대내외에 강조해왔던 점에 비추어 보면 표 사장 퇴진의 명분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SK텔레콤 노조에서 표 사장의 퇴진을 문제삼기 위해 공론화 과정을 거치고 있고, 참여연대에서 표 사장 사퇴로 인해 결과적으로 사외이사가 줄어든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어 앞으로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최악의 경우 최태원 회장 단일체제는 SK에선 소버린의 공격에 휘둘리고, SK텔레콤에선 ‘신뢰받는 전문경영인을 오너 뜻대로 물러나게 했다’는 여론의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커졌다.
게다가 이번 사태를 통해 여전히 그룹 내 위치가 확고함을 보여준 손길승 회장의 그룹 내 위상 변화와 그를 따르던 인물들의 거취도 변수다.
권력을 위해서는 친구도, 형제도 없는 것일까. 현재 SK그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태원-손길승-표문수 3인방의 행보는 비정함마저 느끼게 한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싸움의 명분은 겉으로는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