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21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결정청구인 대리인단을 이끈 이석연 변호사(왼쪽)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이 나온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하지만 신행정수도 이전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강하게 확신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석연 변호사(50). 그는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연구관(2급)을 거친 뒤 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각종 헌법 관련 공익소송을 주도해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40여 건의 헌법 소원 소송을 제기해 그 중 10여건에 대해 위헌 소송을 이끌어내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6월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 소원 제기 의사를 처음 밝힌 뒤 미국 등을 방문해 각종 자료 수집을 하는 등 치밀하게 재판 준비를 했다고 한다. ‘헌법 지킴이’ 이석연 변호사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고 싶은 길을 취재해봤다.
지난 10월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참여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큰 정책 하나가 완전히 좌초하고 말았다. 이번 헌재의 결정으로 여권의 개혁 추동력에 급브레이크가 걸리면서 향후 정국 운영에도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헌재는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국가적 혼란을 ‘법적으로’ 교통정리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헌재가 입법부의 권한을 무시한 채 보수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앞장섰다’며 헌재 무용론을 주장하는 등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게 퍼지고 있다. 사실 여권은 신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이 헌재 재판관 9인의 마지막 방어선을 뚫고 조만간 그 첫 삽을 뜰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석연 변호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신행정수도 이전을 발표할 때부터 그것이 위헌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소송 준비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6월 “수도 이전은 국가 안위에 관한 헌법적 사안인데도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은 채 국회의 졸속 입법으로 추진되고 있다”며 “수도 이전으로 피해를 보게될 시민들을 모집해 청구인단을 구성, 헌법소원을 제기할 것”이라고 발표한 뒤 구체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 뒤 5개월 동안 미국 등지를 오가며 자료 수집을 하며 나름대로 철저한 재판 준비를 해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헌법정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국민의 헌법 마인드를 키워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는 밝혔다.
이석연 변호사는 54년 4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특한 머리로 동네에서도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머리에서는 범상치 않은 생각들이 들끓었고 결국 그의 삶의 궤적도 사회가 요구하는 직선이 아닌 ‘삐딱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 만인 71년 7월 대입검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한 뒤 그 해 대입 예비고사도 일사천리로 통과해 화제를 뿌렸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대학생이 되기에 너무 어렸던 그는 대학진학을 미루고 전북 금산사 신원암에 들어가 암자생활로 고교생활을 대신했다.
이 변호사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당시 독서에 목말랐고 1년8개월 동안 세계문학전집과 수필집 등 2백여 권을 읽었다”며 “그 시절의 독서가 이후의 삶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친구들이 사춘기를 핑계삼아 방랑의 길을 걸을 때 홀로 입산해 자신만의 내공을 닦는 데 몰두했던 청년 이석연은 그때의 경험을 지금도 인생의 소중한 나침반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73년 3월 전북대 법학과에 입학, 대학원 재학 때인 79년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법제처 법제관실로 발령을 받아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81년 서울대 박사과정에 입학해 형사법을 전공했는데 이곳에서 당시 지도교수였던 이수성 교수를 만나 ‘정치’에도 눈을 뜨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법시험에도 합격한 그는 정훈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법제처로 다시 돌아온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다시 법제관으로 복직했지만 89년 5월부터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2급)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91년8월 서울대에서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그는 검찰권 행사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정치권력형 사건에 대한 특별검사제 도입을 최초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헌법 등대지기로서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결심한 시기도 이때다.
이 변호사는 “헌법재판소에서 일할 때 현행법에 위헌 요소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연구관으로는 이를 고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직접 위헌소송을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줄기차게 재판관들에게 위헌 의견을 올렸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현직에 몸담고 있는 한계를 실감하고’ 결국 헌재의 문을 떠났다.
이 변호사는 행정부 8년, 사법부 7년의 공직 생활을 뒤로 하고 주위 선배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 94년 5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이때부터 그는 헌법 소송을 전문으로 ‘헌법 등대지기’의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그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국회의원들의 당리당략에 의한 선거구 획정(95년), 경제난국 와중에서 기도된 국회의원들의 세비인상(97년) 등에서 위헌 결정을 받아내 ‘정치권의 장외 저격수’로도 이름을 얻게 된다.
그는 99년 11월에는 경실련 활동에도 뛰어들어 사무총장을 맡아 2년 동안 활동했다. 이때 그는 과감한 내부 개혁을 통해 흩어졌던 전문가들이 시민운동으로 돌아오게 하는 등 공을 쌓기도 했다. 그는 경실련 사무총장을 그만둔 뒤에도 각종 공익소송을 전담해 헌법 소송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던 중 신행정수도 이전 특별법도 결국 헌재의 위헌 소송을 이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난 뒤 법정을 나오는 이석연 변호사가 취재진에게 둘러싸여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이 변호사는 “이미 내려진 헌재 결정을 두고 그 타당성을 묻는 인터뷰라면 사양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인간’ 이석연에 대한 인터뷰임을 밝히고 나서야 다시 그와 통화의 끈을 이을 수 있었다. 그는 헌법 전도사답게 헌법에 대한 기본정신부터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다.
“헌법의 기본 정신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원리, 적법절차를 핵심으로 하는 법 집행,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핵심으로 하는 기본권 존중주의, 이 네 가지다. 헌법의 기본 이념을 토대로 사회의 모든 현안과 갈등이 해결되어야 한다. 통일과 경제정책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위반하거나 벗어나는 정책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과감하게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다른 정권에 비해 노무현 대통령이 법치주의나 절차적 정의 등을 더 무시한다고 보나.
▲현 정부는 출범 초기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면서 나름대로 의욕을 보였다. 개혁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거대한 이념이나 담론의 장이 아니다. 현 정부는 개혁을 내세워서 2년 동안 끌어오는데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오히려 헌법에 기초한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고 목적의 정당성만을 내세운 채 개혁을 끌고 가다 보니 국민통합에도 실패했고 개혁에도 실패를 했다.
─이번 헌재 소송 과정에서 외부 압력도 있었다고 하는데.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겠다. 직간접으로 여러 경로 통해서 ‘가능하면 손을 떼는 게 좋겠다’며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소신 하나로 버텼다.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많이 받았나.
▲처음부터 권력이나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면 이런 공익적인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DJ 정부 때는 장관급 요직도 제의 받은 적이 있다. 현 정부 들어서도 공직을 제의 받은 바 있다. 가까운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한 자리 할 것인데 왜 그러느냐’면서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실제로 이 변호사는 지난 4·15 총선 과정에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으로부터 당 공천심사위원장 자리를 제의 받았지만 거절했다. 또한 DJ 정부 때는 당선이 유력한 서울의 지역구를 주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소송 대리인으로서 수임료는 받았나.
▲일체 안 받았다. 처음부터 공익소송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내 비용을 들여 자료 수집 차 외국에도 갔다 왔고. 사무실 유지하는 정도는 벌고 있다. 공직에 있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처음부터 애들 교육시키고 생활하는 데 불편 없을 정도다. 큰돈은 못 벌었지만 공익소송을 하면서 일부는 수임료도 받고 그랬다.
─일부에서는 경실련 사무총장 등의 사회 운동을 하는 것도 자신의 지명도 높이기라는 지적도 있는데.
▲경실련 총장 하면서 공익소송을 제외하고 일반 사건은 일체 수임하지 않았다. 또한 경실련 총장 재직 때 1백50만원 월급을 받았는데 전부 반납했다. 판공비도 한 푼 받지 않았다. 그때는 내 돈 1억원으로 생활비도 하고 외부 인사들도 만나고 그랬다. 이권이 개입된 큰 사건도 맡을 기회가 많았지만 망설임 끝에 포기한 예가 한두 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무실 문을 닫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무총장 연임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으로 끝내자고 다짐하고 그만두었다. 지금도 사무총장 자리는 단임 정신이 지켜지고 있다.
─한전 사외이사로 재직중인데.
▲국민의 입장에서 막대한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 투자기관이 어떻게 운영되고 관리되는가를 감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이다.
─법조계에 존경하는 인물이 있나.
▲법조계는 크게 반성해야 한다. 법조계 출신이 정치권에 가서 성공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변호사 출신으로 처음 기대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상당히 실망하고 있다. 최근 헌재 판결에 대한 그의 반응을 보고 더욱 실망했다.
─독서광으로서 인상에 남는 책은.
▲알렉산더 대왕과 징키스칸 두 영웅의 전기나 일대기는 뭐든 다 읽는다. 중국 고전 등을 보고 생활의 지혜도 많이 얻는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공익소송센터는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헌법에 어긋난 법과 제도를 헌법 정신에 맞게 고치자는 취지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좀 더 합리적 이성적으로 논의하는 전문가들의 결사체를 만들고 싶다(이 변호사는 지난해 민변을 탈퇴한 바 있다). 그들과 침묵하는 다수 국민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다.
─이번 위헌 소송으로 느낀 점은.
▲엄청난 국민들의 격려가 있었다. 여권에서는 기득권층이 반대해 위헌 소송이 내려졌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반대다. 헌재 결정 전 택시연합회나 상인조합 등 서민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격려 이메일도 수백통 받았다. 그런데 이번 소송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이나 현 정부가 헌재 결정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이 변호사는 최근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법안 중 하나인 사립학교법 개정안의 위헌심판 청구소송도 맡을 전망이어서 노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법조계의 저격수로 나선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 일간지 법조출입기자는 “이 변호사는 정치권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재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활동에 대한 순수성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평가하면서도 “하지만 노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주관적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위헌 소송에 꿰어 맞춘다는 지적도 나온다”고 말했다. 그의 헌법 지키기에 대한 ‘과도한’ 열정이 때로는 ‘헌법 만능주의’로 비쳐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대한민국에 헌법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사람 한 명쯤은 있어도 된다”고 말한다.
과연 국민들은 어느 쪽 손을 들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