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투심’으로 부활 일궜다
▲ 박찬호. 서울신문 | ||
그래서인지 보통 투수를 인터뷰할 때가 타자보다 훨씬 어렵고 조심스럽다. 심지어 고교생조차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대답한다 싶으면 어김없이 투수다.
이처럼 투수 성격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바로 ‘코리안 특급’ 박찬호(32·텍사스 레인저스)와의 만남을 설명하는 데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
박찬호는 여러 가지 범주에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최초의 한국인 메이저리거이자 무려 10년이 넘도록 메이저리그에 머물며 통산 100승(현재 97승)을 눈앞에 두고 있는 대단한 선수다. 국내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이다 보니 늘 일반인들에 회자되는 편이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박찬호는 언론 앞에선 매우 조심스럽다. 물론 원래 성격 역시 자존심이 강하고 내성적인 편이다. 한국선수라곤 단 한 명도 없었던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언어 문제, 은근한 인종차별 문제 등 온갖 시련을 다 겪은 박찬호는 자기암시를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련해 왔다.
‘부활이냐 은퇴냐’의 기로에서 출발한 올시즌. 지난 2월 초 스프링 캠프에 합류할 박찬호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기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 그와 일면식도 없다(이전 국내 입국과 각종 행사 때 취재를 했지만 1대1 인터뷰를 할 기회는 없었다)는 것이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상대는 야구 일생에 있어 가장 미묘하고 예민한 시기를 맞은 대한민국 최고 스포츠 스타. 허심탄회한(대부분 기자들의 소망인) 인터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고,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난 3개월간 숨바꼭질 하듯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만난 박찬호에 대한 인터뷰 순간들을 부분적으로 공개한다.
2월 18일 스크링캠프
애리조나 피닉스 서북쪽의 작은 도시 서프라이즈. 텍사스와 캔자스시티의 스프링 캠프장이 있는 한적한 장소다. 2005년 스프링캠프의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는 첫날. 미국에서 처음 만난 박찬호의 모습은 많이 달라보였다. 겨울 국내에 귀국했을 때 모교인 한양대에서 가진 ‘박찬호 장학금’ 전달식 때 봤던 길게 휘날리는 ‘테리우스’ 머리는 오간데 없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짧은 머리 군데 군데 비어있는 빈 공간이었다. 과거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던 이종범이 겪은 스트레스성 원형탈모증이었다.
▲ 박찬호. 서울신문 | ||
텍사스와의 계약 이후 3년간 받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흔적. 그동안의 마음고생과 재기에 대한 남다른 의욕을 느끼게 해준 첫 만남이었다. 머리를 만지던 박찬호의 허전한듯 쓸쓸한 표정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60개쯤 불펜 피칭을 마친 박찬호는 첫 훈련이 생각대로 이뤄진 듯 밝은 표정이었다. “직구 위주로 컨트롤을 테스트했다”던 박찬호는 올 시즌 관건을 묻자 주저 없이 “스트라이크를 낮게 낮게 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경기를 할 때마다 언급되는 단골메뉴. 호투한 날 박찬호는 “공이 낮게 제구가 잘됐다”고 말하고 부진한 날 “공이 높았다”고 말한다. 올시즌 목표를 “부상 없이 시즌을 마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목표 승수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스프링 캠프 합류 전 개인 훈련이 질적으로 크게 만족스러웠다”며 “특히 LA에서 이창호 트레이너(보스턴)가 마련해준 프로그램별 훈련이 유연성과 밸런스를 잡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며 흡족해 했다. 예민한 상대란 걸 알고 있었지만 궁금한 성질을 못 참고 ‘방출설’에 대해 물었다. 원래 강렬한 눈빛을 담은 두 눈을 크게 치켜뜬 박찬호는 이렇게 반응했다. “신경 안 쓰는데요. 그런 거 신경 써야 해요?”
3월 5일 시범경기 캔자스시티전
첫 시범경기에서 기대 이하의 결과가 나오자 현지 기자들은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박찬호의 주위를 감쌌다. 하지만 박찬호는 매우 당당한 표정으로 영어 인터뷰를 소화했다. “다시 경쟁에 나서게 돼 기쁘다”는 게 첫 마디였다. 박찬호는 “첫날치곤 썩 괜찮았다. 변화구는 3개밖에 안 던졌다”며 직구를 테스트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부진했던 박찬호의 이 말을 현지 기자들은 곧이 듣질 않았다. 다음날 언론들은 일제히 ‘박찬호 3선발’ 구상에 회의적인 반응들을 보였다.
3월 10일 시범경기 시카고 커브스전
첫 회 4안타와 몸에 맞는 볼로 3실점. 수치적 결과와 관계없이 박찬호는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목소리에 힘이 있고, 거만해 보일 만큼 자신감도 넘쳤다. 올시즌 비장의 무기 ‘투심 패스트볼’을 처음 실전 테스트한 날. 그는 “80% 힘으로 던졌다”며 “제구도 괜찮았고, 투심으로의 땅볼 유도도 괜찮았다”고 말했다. 투심에 대한 질문이 조금 더 쏟아지자 그는 “1회 데릭 리를 삼진 잡은 볼이었고, 3회 홀랜스워스의 유격수 땅볼도 투심으로 잡았다. 컨트롤이나 움직임 모두 좋았다”고 말했다. 다음날 현지 언론(특히 <댈러스 모닝뉴스>)에서는 ‘박찬호가 투심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는 논조의 기사들이 주를 이뤘다. 희망이 조금 더 발전한 셈이었다.
3월 15일 시범경기LA 에이절스전
‘천적’ LA 에인절스 타선을 상대로 박찬호는 완벽투를 선보였다. 깜짝 놀란 현지 기자들이 애리조나 메사의 호호캄파크 클럽하우스에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평소 보이지 않던 TV매체까지 박찬호를 인터뷰하기 위해 동참했다. 수많은 현지 기자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유일한 한국 미디어였던 기자는 한국어로 질문을 할 기회조차 없을 정도였다. 박찬호는 “이번 스프링캠프의 과제는 패스트볼의 제구력 회복”임을 분명히 했다. 이어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공격적으로 피칭을 하니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박찬호 부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었고, 현지 기자들은 ‘천적’인 에인절스를 상대로 무결점 투구를 보인 박찬호에 대해 주목했다. 그 가운데 <포스워스 스타텔레그램>은 경기장에 톰 힉스 구단주가 와있었음을 언급하며 ‘방출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틀 뒤 AP는 ‘당시 에인절스 타선에 주전이 많이 빠져 있었다’며 또다시 의혹을 제기했다. 좀 더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었다.
3월 30일 시범경기 샌디에이고전
백차승, 추신수 등 시애틀 듀오가 스프링캠프를 치른 애리조나 피오리아 스타디움. 원정팀 클럽하우스 트레이너실에선 경기를 마친 박찬호가 어깨와 왼쪽 정강이에 아이싱을 하며 누워있었다. 기다리는 취재진에게 박찬호는 트레이너실로 들어오라고 했으나 <스타텔레그램>의 T.R 설리반 기자는 완고하게 “트레이너실에선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팬티 하나만 걸친 박찬호는 잔뜩 아이싱으로 두른 몸을 일으켜 기자들 앞에 섰다. 한 TV매체에겐 “벗은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박찬호는 “릴렉스한 상태에서 피칭하려 하는데 오늘은 지나쳤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4월 4일 시범경기 샌프란시스코전
오른쪽 담장을 넘어 맥코비만에 빠지는 배리 본즈의 홈런으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SBC파크. 시범경기 최종전을 마친 박찬호는 “낮게 제구된 공이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텍사스 입단 후 가장 알찬 스프링 캠프였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이어 “더 이상 연습게임은 없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5일 후 정규 시즌 첫 등판을 앞둔 투수의 긴장감이 서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