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에 7억원 배려 몰래한 보은
▲ 지난 22일 메디컬테스트를 위해 출국하는 박지성.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박지성과 아버지 박성종씨를 통해 맨유행을 결정하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박지성의 축구 인생의 단면들을 부분적으로 소개한다.
히딩크한테 준 건 ‘마음’
박지성이 맨유행을 결정하기까지 가장 큰 ‘걸림돌’은 자주 언급된 것처럼 히딩크 감독과의 친밀한 관계였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측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히딩크 재단에서 무보수로 일하며 박지성의 영어 과외를 담당하고 있는 세실리아 박과 그의 남편(박지성측 에이전트의 통역 담당)에게 “도대체 지성이한테 내 얘기가 전해지기는 하느냐”면서 “에이전트가 내가 한 말을 지성이에게 전하질 않는 것 같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는 것. 박지성을 잔류시키길 강력히 희망하는 자신의 입장이 정작 선수한테 전달이 안 된 것 같다고 말할 만큼 히딩크 감독은 맨유와 이적 협상을 타결짓기 직전까지도 박지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막상 맨유로 박지성을 보내기로 결정한 뒤에는 오히려 담담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와 지성이와의 인연이 여기까지인 것 같다. 좋은 팀으로 갔으니 반드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면서 맨유에서 적응할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등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박지성은 원래 PSV에인트호벤에 입단할 당시 다른 리그로 갈 경우 이적료의 10%(에이전트 몫 10%는 별도)를 받기로 돼 있었던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그걸 히딩크 감독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 박지성을 소개한 맨유 홈페이지.(위), 2002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골을 넣고 히딩크에게 달려가는 박지성. | ||
맨체스터 ‘대단한 도전’
박지성은 출국 전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맨유 입성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PSV에는 날 잘 아는 감독이 있었고 나에게 열렬한 사랑을 보내준 팬들이 있었다. 그러나 맨유에는 나를 전혀 모르는 감독과 나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팬들이 기다린다. 그래서인지 처음 네덜란드 갔을 때보다 훨씬 많이 긴장되고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명지대를 다니다 J리그에 처음 입성했을 때도, J리그에서 엄청난 인기와 실력을 인정받으며 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네덜란드에 갔을 때도, 그리고 지금 J리그에서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감당하며 영국으로 방향을 정한 뒤에도 박지성의 축구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찌보면 선택에 따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상황도 있었다. 내가 만약 네덜란드에 가지 않고 일본에 남았더라면 별다른 갈등 없이 J리그에 완전히 정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맨유를 선택하지 않고 에인트호벤에 남았다면 밤을 지새우며 고민할 필요 없이 PSV에서 여유롭게 생활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선택에 따른 후회도 있을 것이고 어려움도 겪겠지만 그래도 난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내 축구인생은 그래서 ‘도전’이란 단어와 늘 연결되는 것 같다.”
박지성은 맨유에서의 목표를 아주 낮게 잡았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아버지도 부탁한 내용이라고.
“난 맨유에서 유명한 스타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처음엔 10분, 20분, 조커로 뛰는 데 만족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반 게임을 뛸 수 있고, 또 그런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노력하다보면 어느날 반 니스텔루이, 웨인 루니 등과 함께 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꿈의 제안…기쁨과 갈등
맨유행이 최종 결정되기 전까지 박지성은 숱한 번민의 밤을 보내다 어느 날 불교 신자인 어머니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엄마, 오늘 절에 가서 주지스님께 내가 맨유를 가는 게 옳은 건지, 히딩크 감독 밑에 남는 게 더 좋은 건지를 좀 물어봐 주세요.”
▲ 2006독일월드컵 최종예선 쿠웨이트전에서 드리블하는 박지성. | ||
박지성은 처음 맨유에서 자신한테 ‘러브콜’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아무나 갈 수 있는 팀이 아니기 때문에 더 기뻤다. 살다보니까 이런 명문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도 받는구나 싶었다. 너무 좋아서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좋은 기분은 며칠 못 갔다. 히딩크 감독과의 인연을 생각하니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시작됐다. 한 20여 일간 천당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었는데 그래도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을 놓고 고민했기 때문에 그건 위로가 됐다.”
그토록 ‘알뜰한 청년’이기에
박지성은 맨유로 가면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몸값을 받게 됐다. 연봉만 2백만파운드(약 37억원)로 4년의 계약기간을 고려하면 최소 1백48억원의 돈을 챙기게 된다. 여기에다 각종 출전 수당과 보너스, 그리고 CF 출연료 등을 합치면 한국의 어느 축구선수도 기록하지 못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그러나 박지성은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다.
“재벌이라면 도대체 얼마를 벌어야 그런 소리를 듣는 건가. 난 이런 쪽으로 해석하는 관심들이 좀 부담스럽다. 나한테 들어오는 모든 돈을 아버지가 관리하시기 때문에 내가 얼마를 벌었는지 전혀 모른다. 맨유행도 많은 연봉보다는 팀 자체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 돈 얘기를 꺼내면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중에 내가 지도자 생활할 때 선수들한테 당당히 설 수 있을 정도의 돈만 있으면 된다.”
‘스포츠 재벌’ 운운하는 데 따른 박지성의 부담에 대해 아버지 박성종씨는 “지성이 나이론 많이 버는 건 사실이다. 지금은 좀 욕을 먹어도 더 벌어야 한다. 하지만 지도자가 돼선 돈 때문에 욕 먹으면 안 된다. 사회에도 환원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남은 돈은 알뜰히 모아서 지성이의 축구 후반부 인생을 준비해줄 생각”이라고 밝혔다.
알뜰하고 검소하기로 소문난 부모 밑에서 성장한 박지성은 돈 쓰는 데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는 편이다. 친구들 만나서 밥값을 내는 것 외에는 사치를 모르고 살았다. 다른 선수들이 명품에 눈길을 돌려도 박지성은 티셔츠와 청바지에 운동화 신는 데에 만족했다. 박성종씨가 들려준 최근의 일화다.
“이번에 귀국해선 지성이가 모처럼 고등학교 동창들을 음식점을 초대해서 밥을 산 적이 있었다. 한우갈비집이었던 탓에 난 당연히 백만원 이상의 밥값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지성이 얘기를 들으니까 소갈비가 아닌 돼지갈비를 먹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아빠, 돼지갈비도 맛있던데요? 에이 소갈비 먹었으면 백만원은 넘게 나왔을 텐데 어떻게 소갈비를 먹어요’라고 하더라. 돈 쓰는 걸 무서워하고 어쩌다 지출이 클 경우에는 나한테 혼날까봐 명세표를 숨겨 놓곤 시치미를 떼곤 한다.”
축구 시작하면서 대학 입학하는 걸 최고의 목표로 세웠다는 박지성. 대표팀에 뽑히지 못해도 4년제 대학에 진학만 한다면 여한이 없을 거라고 말했던 부모의 간절한 바람대로 첫 번째 목표를 이뤘던 그는 이후 여러 차례의 신분 상승을 거쳐 지금은 대학 졸업장이 결코 부럽지 않은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로 탄생했다.
물론 프리미어리그 생활이 예기치 않은 수많은 변수들로 인해 고행의 연속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선수도 아닌 박지성이기에 별로 걱정이 안 된다. 당분간은 박지성의 성공보다는 제대로 된 적응을 위해서 우리한테는 기다림과 믿음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