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실거리려고 여기 나온 것 아니다”
▲ ‘부드러운 입’으로 정치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 그러나 그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야당 대변인으로 근본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 그는 지난해 17대 개원 이래 당 지도부로부터 ‘삼고초려’의 대변인 직 제안을 받았지만 계속 거절하다가 최근 당직 개편을 통해 당의 ‘입’으로 데뷔했다. 그런데 그의 첫 일성이 좀 황당했다. “재미있는 정치에 일조하는 ‘소변인’(笑辯人)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말끝마다 상대 흠집내기에 골몰해오던 여야의 대변인 논평 관행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한 생각이다. 당내에서도 야당 대변인이 너무 무르면 여당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며 걱정스런 표정이다.
하지만 이 대변인은 자신에 찬 표정이다. 자신이 독설과 정치공세를 자제하면 정치 논평 문화도 자연스럽게 웃음과 재미가 넘치는 수준 높은 토론의 장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내 식대로 안되면 딱 물러나겠다”면서 맘 편하게 정치문화를 한번 바꿔보고 싶다며 의욕을 보인다.
과연 여의도에 ‘이계진식 햇볕 논평’이 뿌리내리게 될까. 신임 대변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계진 의원을 의원회관에서 만나 그 ‘해답’을 들어보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텔레비전 속의 이계진 아나운서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에서 동물의 세계를 구수한 해설로 설명해준 마음씨 넉넉한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해 강원 원주를 지역구로 17대 총선에 뛰어들면서 30여년간의 방송활동을 접었다. 정치 입문의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갑자기 결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총선 당시 이계진 후보는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가 기존 조직을 넘겨주지 않아 조직원 7명으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한다. 기적에 가까운 승리.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무명으로 시작한 방송인이었듯이 무명으로 시작하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속으로 수십 번 다짐했다고 한다.
돌아보면 그가 그렇게 다짐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는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군 복무 중 KBS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내성적 성격에 수줍음이 많은 그를 보고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아나운서가 된 뒤 8년 동안 철저히 무명으로 지냈다. 마감 직전 뉴스 프로그램이나 새벽 라디오 방송 등 사람들이 잘 보고 듣지 않는 시간대에 주로 배치됐다. 이름을 확실히 얻기까지 22년이 걸렸다. 방송 경력 3분의 1 이상을 무명으로 보낸 셈이다. 하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항상 준비했고 결국 방송인으로서는 성공했던 셈이다”라고 말한다.
한발 한발 미래를 준비했던 ‘아나운서’ 이계진의 노력은 2004년 국회에 들어와서도 계속된다. 그는 지난 11월21일 한나라당 당직 개편 때 대변인 제의를 받기 전 이미 세 차례나 당직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다. 자신이 무명으로 지냈던 방송국에서의 교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그의 부드러움, 꽃에서 배웠을까?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이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난을 살피고 있다. | ||
이런 점에서 이계진 의원은 바로 ‘준비된’ 대변인이다. 방송계에서 이름을 얻기까지 무려 22년 동안 준비한 것에 비하면 정치권에 입문한 지 ‘고작’ 1년6개월밖에 안된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대변인에 임명된 뒤 처음 단상에서 외쳤던 한마디는 “재미있는 정치에 일조하는 ‘소변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대변인을 대변하는 이 한마디는 그가 국회 입문 뒤 그동안 ‘공부’한 내용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의 내 정치 소신을 기억하기 좋게 그렇게 얘기한 것뿐이다. 웃음과 유머가 있는 대변인이 한번 되어보겠다. 지금은 여러 가지 걱정되는 면이 많아서 내용도 딱딱하지만 차츰 내 페이스대로 끌어올릴 것이다. 처음부터 대변인 스타일이 확 바뀌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적절한 기회가 오면 우스운 얘기를 끌어들일 수 있도록 계속 시도할 생각이다.”
그는 철저히 준비된 ‘내공’을 좀 더 쏟아낸다.
“정치 혐오가 극에 달한 느낌이다. 그렇게 된 배경에 대변인 문화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본다. 앞분들이 잘못 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대변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일단 험악한 것을 발표한 뒤 싹 빠지고 다시 공격하고 그런 악순환이었다. 나는 그것을 좀 바꾸자는 것이다. 대변인으로서 내가 내세우는 기본 철학이 있다. 나의 논평은 첫째 국민, 두 번째 당, 세 번째 당 지도부, 네 번째는 나 이계진을 위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절대 내가 튀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당 지도부를 소홀히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은 결국 우리끼리 좋다고 하는 그런 논평이 아니라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입장에서 논평을 낼 생각이다.”
▲ ‘얻었다 한들 원래 있었던 것, 잃었다 한들 원래 없었던 것.’ 이계진 대변인이 벽에 붙은 글귀를 가리키고 있다. | ||
그는 기존 대변인 논평 관행을 일시에 확 바꿀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기회에 꼭 한번 ‘삭막한’ 정치 문화를 바꾸고 싶어 한다. 아니, 그의 꿈은 더 원대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여당 전병헌 대변인은 내 대학(고려대) 후배다. 전에는 잘 알지 못했는데 그 분은 그 분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다. 나는 부드러운 내 스타일대로 할 것이다. 그런데 전 대변인이 나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계속 부드럽게 나가면 전 대변인 혼자서 흥분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국회의원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청와대 대변인이 혼자 소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국민들이 그 대변인 문화가 좋다고 하면 따라오는 것이다. 결국 대립만 하는 정치 구도도 좀 변하지 않을까.”
하지만 당내 일각에서는 “야당 대변인이 물렁물렁한 논평만 내면 여당에서 얕잡아 보고 결국 정국 주도권도 빼앗긴다”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자신의 스타일이 통하지 않으면 언제든 떠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아직은 삭막한 정치 스타일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많다. 기자들도 세게 좀 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부드럽게 나갈 것이다. 큰소리친다고 자극적인 것은 아니다. 내 말의 내면을 살피면 그 안에 뼈가 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야성’(野性)이 있는 대변인임을 잊지는 않는다.
“일단 논평 스타일만 바꾸는 것이다. 그 내면에 흐르는 메시지는 확실하다. 부드러운 논평에 재미를 들여서 할 말을 못하고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야당 대변인으로 근본은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차기 집권을 해야하는 한나라당의 대변인이다. 내가 그렇게 실실거리려고 여기 나온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의 책상 뒤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얻었다 한들 원래 있던 것, 잃었다 한들 원래 없던 것.’(법구경의 한 구절)
삭막한 정치권에 웃음 바이러스를 퍼뜨리겠다는 이계진 대변인. ‘햇볕 논평’으로 대변인 직을 잃었다 한들 원래 없던 것으로 여긴다면 그의 웃음 바이러스가 여의도에 훈훈하게 퍼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