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1일 김태환 제주도지사 후보가 당선이 확정된 뒤 만세를 부르고 있다 (위), 지난해 1월 제주 세계평화의 섬 서명식 뒤 노 대통령과 김 지사. | ||
이들 두 당선자 모두 ‘토박이 공무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박 후보는 이번 선거 최대의 변수인 ‘박풍’으로 인해 생환했고 김 후보는 ‘박풍’을 뚫고 살아남았다는 점이 사뭇 대조적이다. 5·31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붙들어맨 두 주인공의 안팎을 ‘검색’해봤다.
[김태환] 제주지사 당선자
‘이래착 저래착’ 해도 ‘괸당’의 힘
김태환 당선자(64)에게는 늘 ‘입지전적 인물’ ‘신화적 인물’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말단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관선 제주시장, 행정부지사까지 오르는 ‘내공’을 발휘했고 지방자치 실시 후에는 민선 제주시장을 연임한 뒤 제주지사에 연거푸 당선됐기 때문.
지금은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지만 학창 시절 그는 ‘법조지망생’이었다. 지방 명문인 전주고와 제주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도전했으나 일찌감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점점 기우는 가정형편 때문에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지난 64년 9급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는 제주시청 재무과. 그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진급시험에 해당하는 공무원 소양고사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얻어 당시 지방공무원의 ‘출세코스’로 불리던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에 발탁돼 10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이 기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30년이 넘는 공직생활의 전부를 제주도에서 보내며 시장과 도지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는 김 당선자의 생활신조에서 보듯 그의 관운이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룬 것’이라는 게 주변의 공통된 전언이다.
그러나 김 당선자는 그간 몇 차례의 지방선거에서 ‘철새 행각’으로 비칠 만한 행보를 보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 98년 국민회의 간판으로 제주시장에 당선됐지만 국민회의를 승계한 민주당과의 불화로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주시장에 당선됐다. 2004년 우근민 전 제주지사의 선거법 위반으로 치러진 제주지사 재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간판으로 나와 당선됐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도 당초 불출마를 결심했다가 번복, 출마를 결심한 것이나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기 위해 입당을 선언했다가 하루 만에 자신의 말을 뒤집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대체 정치적 소신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살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 당선자 측은 이번 선거 때의 ‘갈지 자’ 행보와 관련해 “처음부터 김 당선자가 다른 후보들에 비해 지지율이 두 배 이상 나왔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이 제주지사 후보를 따로 영입하겠다고 나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여와 야를 오갔던 그의 행보는 이번 선거에서도 일정 부분 마이너스로 작용한 듯하다. 하지만 그가 40여 년간 제주에서 쌓은 내공은 무서운 저력을 발휘했다.
이번 선거기간 시작 전만 해도 김 당선자는 여러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였다. 유력한 경쟁후보였던 한나라당의 현명관 후보를 적어도 10%포인트 이상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그의 흔들리는 행보 때문인지 막상 선거기간이 시작되자 지지도가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열린우리당 입당 번복 사태로 ‘이리저리’의 제주 방언인 ‘이래착 저래착 김태환’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게다가 박근혜 대표의 피습사건 이후 제주 민심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의 정당지지도가 40%대를 넘나들었다. 한나라당 현 후보도 정당지지도에 희망을 걸었으나 결국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당지지도와 무관하게 무소속 후보를 광역단체장으로 선출했다. 개표 결과 김 당선자가 42.7%, 현 후보가 41.1%를 얻었다.
이를 두고 제주 사정에 밝은 한 정치권 인사는 “제주도에는 여당, 야당 말고도 ‘괸당’이라는 게 있다. ‘괸당’은 제주방언으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 즉 친족, 혈족 등을 뜻하는 말로 그만큼 제주에서는 인맥이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이 인사에 따르면 이런 점 때문에 제주에서는 정당지지도와 후보지지도는 항상 따로 움직인다고.
또한 ‘외지인’에 대해 배타적인 분위기도 선거에 반영됐다는 후문이다. 한나라당 현 후보도 제주에서 출생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현지에서 나왔지만 이후 50년이 넘게 중앙무대에서 활동해 제주도에서 그는 제주사람이 아닌 서울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현 후보가 서울에서 돈도 잘 벌고 잘나갈 때 고향에 무관심하다가 갑자기 도지사에 출마해 표를 달라고 호소한 것이 민심의 반감을 불렀다는 해석도 있다.
반면 김 당선자는 ‘경조사 도지사’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오랜 공직생활 동안 지역의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겨와 제주에서 “서민을 아는 사람은 김태환밖에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선거 때마다 상대 후보 진영에선 이런 김 당선자를 두고 “상갓집 정치를 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김 당선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제주는 혈연, 지연, 학연이 그물망처럼 얽힌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자연스런 만남을 통해 부지런히 민심을 살피는 게 뭐가 문제인가”라고 말했다.
▲ 지난 1일 대전시 선관위로부터 당선증과 꽃다발을 받고 웃고 있는 박성효 대전시장 당선자(왼쪽), 지난 29일 퇴원 후 대전을 방문한 박근혜 대표 대신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박 당선자. 연합뉴스 | ||
자신이 ‘올인’한 제주 특별법 덕에 그는 이제 ‘제왕적 도지사’란 말이 나올 정도로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받은 초대 특별자치도의 지사가 됐다. 이번 선거 기간 내내 그는 입버릇처럼 “내 손으로 제주특별자치도를 완성하고 싶다”고 도민들에게 호소했다. 과연 그는 어떤 제주도를 만들어나갈까.
[박성효] 대전시장 당선자
무명 아이디어맨 ‘박풍’ 타고 날다
사실 대전은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한나라당에서는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었던 곳이었다. 현 시장인 열린우리당 염홍철 후보의 아성이 워낙 두터웠던 탓이다. 지난해 지역 언론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염 후보가 50%대의 지지율을 달릴 때 박성효 당선자(51·전 대전시 정무부시장)는 2%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쳤다.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된 후에도 그의 지지율은 정당지지도에도 못 미치는 25% 내외였다. 박 대표의 피습 직후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도 박 당선자(23.7%)가 열린우리당 염 후보(43.7%)에게 크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박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박 대표가 병상에서까지 “대전은요?”라고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지면서 민심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퇴원 직후 이뤄진 박 대표의 전격적인 대전 방문은 대세를 뒤바꿔놓기에 충분했다. 결국 개표 결과 박 당선자는 43.8%의 득표로 41.1%를 얻은 염 후보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박풍’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이번 선거 최대의 행운아다. 하지만 박성효가 아닌 다른 인물이 염 후보와 경합을 했더라도 이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는 고개를 젓는 이들이 적지 않다. 행정가로서 그의 능력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박성효 당선자는 대전 토박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중·고를 거쳐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그가 공무원으로서 25년의 공직생활 전부를 보낸 곳도 바로 대전이다.
박 당선자는 시정 중에서도 특히 경제, 기획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두 번에 걸쳐 4년 6개월간 경제국장을 맡았고 최장수 기획관리실장(4년 5개월)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대전시의 현안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며 시의 굵직굵직한 사업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다. 특히 경제국장 재직 시절엔 ‘대덕밸리’의 산파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덕밸리’라는 용어도 그의 작품이다.
공직자로서 열정적이며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원칙주의자라는 게 주변의 평. 고시 공부를 하던 시절 행정법 교과서 첫머리에 나오는 “다리를 놓는 사람은 자기가 건너기 위해서가 아니라 뒷사람을 위해 다리를 놓는다”라는 글을 평생 행정가로서 삶의 지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 당선자의 열정과 능력을 높이 평가해 발탁한 사람은 이번 선거에서 맞대결을 펼친 염 시장이었다. 둘의 만남은 지난 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관선 대전시장으로 부임한 염 시장이 시 간부들과 상견례를 겸해 만난 자리에서 당시 경제국장이던 박 당선자가 염 시장이 속옷 상의를 입지 않아 하얀 와이셔츠 속으로 속살이 비치는 것을 보고 “시장님, ‘런닝구’를 입으십시오”라고 말을 건넨 것이 두 사람의 만남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에세이 <다리를 놓는 사람>에서 박 당선자는 “시장으로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만날 텐데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으로 남을지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로 한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염 시장은 그 날로 속옷 상의를 사서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 후로도 염 시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박 당선자를 소개할 때마다 “나에게 런닝구를 입힌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그 정도로 염 시장이 자유롭고 탈권위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후 염 시장은 박 당선자의 업무 능력을 높이 사 대전 서구의 마지막 관선 구청장으로 ‘발탁’했다. 그때 박 당선자의 나이가 39세. 30대 구청장의 탄생이었다. 관선 구청장의 임기를 마치고 박 당선자는 염 시장의 재임기간 동안 경제국장과 기획실장 등 시의 요직만을 거쳐갔다. 올 초에는 염 시장이 박 당선자를 정무부시장으로 또 한번 발탁하기도 했다. 박 당선자의 ‘아이디어맨’이라는 별명도 염 시장이 붙여준 것이다.
지역 정가에서는 광역단체장과 그를 정무적으로 보좌해온 부시장 간의 보기 드문 대결이라는 점에서 이번 선거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두 사람의 남다른 공직 인연도 곧잘 화제로 오르내렸다. 이를 두고 염 시장은 “금실 좋은 부부였다가 일방적으로 이혼당했다”고 평했고 박 당선자는 “부인(한나라당)이 아플 때 이혼(탈당)하는 남자가 가장 비겁하다”고 맞받았다. 염 시장은 지난해 3월 “행정수도 건설에 반대하는 당에 남을 필요가 없다”며 한나라당을 탈당한 바 있다.
서로 존경하고 아끼던 두 사람은 이번 선거를 통해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후문이다. 선거 초반 박 당선자는 염 시장의 탈당 문제와 을지의대 수뢰사건에 대한 의혹을 적극 제기하는 등 정치공세를 취하다가 양 진영이 ‘막말 신경전’까지 펼친 일도 있었다. 지역의 한 행사장에서 마주친 두 후보가 언쟁을 벌이다 얼굴을 붉힌 적도 있다고 한다. 약세 후보로서 네거티브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박 당선자와 이에 ‘함무라비 법전’ 식으로 대응하던 염 시장 측의 전략이 낳은 부작용이기도 했다.
결국 5·31 잔치는 끝났지만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아직 풀리지 않은 듯한 모습이다. 상사로 모시던 염 시장에 대한 ‘지나친 도발’이 부담으로 작용했던지 박 당선자는 당선이 확정된 후 “한때 모셨던 분에게 선거과정에서 불편함을 드렸다면 죄송하다. 대전 사랑이 많은 분이시니 대전 발전을 위해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다”라고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