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의 이름으로 위험한 외줄타기?
▲ 문재인 전 민정수석이 여권을 분열시킬 수도 있는 당-청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올 1월 민정수석 시절 청와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는 모습. | ||
아직 공식적으로 법무장관을 지명하지도 않았고 본격적인 거명도 없었는데도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문재인 불가’ 입장을 먼저 치고 나왔다. 청와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강행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문재인 전 수석을 둘러싸고 당·청 갈등이 친노 대 비노·반노그룹 간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되면서 정치권 일각에선 ‘여권 분열’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열린우리당 호남권 일부 의원들은 “문재인 카드를 강행할 경우 특단의 결단을 내리겠다”며 청와대를 압박하고 있고 일부 소장파 의원들 사이에서는 ‘대통령 탈당론’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과연 문 전 수석이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과 역할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청와대와 열리우리당이 ‘여권 분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로 나오는 것일까.
후반기 정국주도권 장악 및 대선정국을 겨냥한 당·청 수뇌부들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노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문 전 수석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상징성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문 전 수석은 자타가 인정하는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다. ‘왕수석’ ‘참여정부 2인자’ ‘PK사단 대부’ ‘왕의 남자’ 등 문 전 수석 이름 뒤에 따라붙는 화려한 수식어는 노 대통령과 그의 특별한 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노 대통령과 문 전 수석의 인연은 지난 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산에서 함께 인권변호사 활동을 했던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노 대통령과 문 전 수석은 이후 끈끈한 우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정치적 동지 관계로 발전했다. 노 대통령은 7세 아래인 문 전 수석을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문 전 수석과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 서슴없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며 문 전 수석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참여정부 출범 직후 문 전 수석을 청와대 요직에 등용하며 정치적 조언을 받아왔던 것도 이 같은 두 사람의 각별한 동지관계에서 기인한다. 문 전 수석은 2003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복귀했다가 지난 5월 사퇴했다. 그리고 사퇴 당시부터 후임 법무장관 설이 돌기도 했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2004년 2월 민정수석에서 물러난 배경에는 여권의 총선 올인 전략과 맞물린 ‘청와대 참모진 총선 차출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여권은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에게 총선에 출마할 것을 촉구했다. 문 전 수석도 부산 출마를 권유받았지만 그의 불출마 의지는 확고했다. 문 전 수석의 소극적인 태도는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노 대통령의 측근인 염동연 의원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왕수석’ 노릇하니까 계속 하고 싶은 것인가”라며 문 전 수석을 향해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결국 문 전 수석은 염 의원의 공격을 받은 지 3일 만에 사퇴했다. 건강과 업무적 중압감을 사퇴 이유로 들었지만 ‘총선 차출’을 둘러싼 비판과 압박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문 전 수석을 오래 쉬도록 놔두지 않았다. 문 전 수석은 4월 총선이 끝난 후 3개월 만에 다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복귀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시민사회수석실을 신설하면서까지 문 전 수석의 복귀를 강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문 전 수석은 노 대통령의 지근에서 핵심 참모역할을 수행해 왔다. 야권 일각에선 문 전 수석이 지난 5월 민정수석 자리를 그만둔 배경에는 법무장관 기용을 염두에 둔 사전 포석이 내포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표하기도 했다.
▲ 인권변호사 활동을 함께한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전 수석은 사실상 ‘정치적 동지’관계다. 지난해 10월 북악산 숙정문에서. | ||
문 전 수석은 참여정부 핵심실세로 통하고 있지만 그는 늘 전면에 나서기보다 노 대통령 뒤에서 그림자 보좌를 해왔다. 이번 법무장관 기용을 둘러싼 논란이 일기 전에도 문 전 수석은 수차례 입각 제의를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법무장관 카드에 대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열린우리당까지 반발하고 있는 직접적인 이유는 두 사람이 너무 친밀한 사이라는 점이다.
야권은 김병준 부총리를 낙마시킨 여세를 몰아 노 대통령의 인사권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레임덕을 앞당긴다는 정치적 계산 아래 ‘문재인 불가론’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카드’를 둘러싼 여권의 이해관계는 더욱 복잡하다. 열린우리당이 ‘문재인 불가론’을 주장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김병준 사퇴 후폭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핵심 측근인 문 전 수석을 법무장관에 기용할 경우 ‘측근 인사’ 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고 이에 따른 비난 여론도 확산될 것이란 우려감을 들고 있다.
‘문재인 불가론’ 배경에는 차기주자들의 대권 이해득실과 호남권 의원들의 ‘민심잡기’ 포석도 어느 정도 내포돼 있다. ‘문재인 비토’의 선봉장이 다름아닌 유력한 차기주자인 김근태(GT) 의장과 정동영(DY) 전 의장계인 김한길 원내대표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GT는 최근 인사문제를 비롯한 정국 현안과 관련해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실제로 GT는 이달 들어 ‘김병준 자진 사퇴 권고’ ‘문재인 카드 반대’ ‘서민경제회복 정책 독자 추진’ 등 청와대와 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와 관련 여권 일각에서는 GT가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 정책을 통해 인지도 제고 및 민심잡기 플랜을 가동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GT가 청와대나 정부정책에 대립각을 세우면 당내 반발이 줄어들고 지지율이 소폭 상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 노 대통령이나 현 정부에 기댈 게 없는 GT가 이번 인사권 논란을 계기로 독자적인 대권행보를 걸을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호남권 의원들은 ‘민심잡기’ 차원에서 문재인 불가론을 외치고 있다. 문 전 수석이 5·31 지방선거 직전에 부산에서 “현 정권은 부산정권”이라고 한 발언이 호남 표심을 자극해 선거 참패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이들 의원들의 논리다.
실제로 5·31 지방선거 이후 호남권 주도권은 민주당으로 넘어갔고 7·26 재보선에서 탄핵 주역인 조순형 상임고문이 당선되면서 범민주개혁세력 통합론 등 정계개편 주도권도 민주당이 쥐고 있는 분위기다. 따라서 호남권 의원들은 호남 표심은 물론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부산정권’ 발언 당사자이자 최측근인 문 전 수석을 법무장관에 중용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민심 이반을 가중시킬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도 ‘문재인 카드’를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김병준 사퇴에 이어 문재인 카드마저 무용지물이 된다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에 치명타를 입게 되는 동시에 후반기 국정운영 주도권도 야당과 열린우리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조기 레임덕이 현실화되는 셈이다. 청와대가 ‘대통령 탈당설’을 흘리면서 당 지도부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도 ‘레임덕 현실화’라는 위기감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재인’ 이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은 더욱 크다. 문 전 수석과 김병준 부총리는 측근 서열 1, 2위를 다투는 ‘노의 남자’로 통한다. 노 대통령과의 관계를 보면 김 부총리는 정책 보좌 역할이 강하고 문 전 수석은 노 대통령의 복심이자 정치적 동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김 부총리 사퇴 후폭풍보다 문재인 카드를 둘러싼 당·청간 전면전 기류와 노 대통령의 최종 선택 이후 불어닥칠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란 관측도 ‘문재인’이란 상징성과 무관치 않다.
노 대통령은 지난주 여름휴가 기간 교육·법무장관 인선문제와 관련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이 조만간 후임 교육·법무장관을 발표하면서 중대 결단을 내릴 것이란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갈수록 인사권 논란 정점에 있는 문 전 수석 또한 적잖은 시름을 감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당·청 갈등의 진원지로 부상한 문 전 수석의 거취 문제가 어떻게 결론날지는 노 대통령의 승부수와 맞물려 하한정국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