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 법칙’ 핵심기술은 ‘실무천하지대본’
▲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황창규 사장이 지난 11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에서 세계최초 40나노미터 공정의 32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공개하고 있다. | ||
그리고 1년 뒤. 2006년 9월 11일 호텔신라. 황 사장은 40나노미터 공정의 32기가비트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공개했다. 그는 “세계가 뒤집어질 일”이라고 자평했다. 지난해 발표한 제품에 비해 두 배로 용량이 커진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황의 법칙’을 증명한 것이다.
황의 법칙이란 지난 2002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반도체회로학술회의 총회에서 황 사장이 “반도체 집적도는 1년에 두 배씩 증가하며 그 성장을 주도하는 것은 모바일 기기와 디지털 가전 등이다”라고 주장했고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를 ‘황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99년 256M 낸드형 플래시 메모리개발, 2000년 512M, 2001년 1기가비트, 2002년 2기가비트, 2003년 4기가비트, 2004년 8기가비트 등 매년 두 배씩 용량을 키워와 올해까지 7년째 증명했다. 내년에도 ‘이변이 없는 한’ 회로선폭에 30나노미터 공정을 적용한 좀 더 혁신적인 메모리칩이 나온다는 얘기다.
‘황의 법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실현되던 90년대 후반부터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 기간 동안 매해 수조원대의 순이익을 기록하는 초우량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80년대 경영학 교과서에 오르는 ‘슈퍼엑셀런트’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나 코카콜라 등 미국계 기업이 절대적이었고 아시아계는 소니 정도였다. 하지만 10여 년 만에 삼성전자는 슈퍼엑셀런트 반열에 올랐고 그 힘은 반도체 산업의 패권 장악이었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는 국내에선 수출액에 있어서 삼성전자의 비중으로 ‘통계착시’라는 부작용을 불러 일으킬만큼 절대적인 액수를 차지했다. ‘삼성전자의 신화’가 시작된 것. 이 같은 신화는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신화의 연구개발자이면서 경영자인 황 사장이 주도한 것이다.
물론 그는 리더인 이건희 회장에게 절대적인 존경심을 내보인다. 이 회장에 대해 그는 “삼성 임직원들이 생각 못하는 화두를 던지는 진정한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라고 말했다. 황 사장같은 천재급 인력을 스카우트한 것도 이 회장의 ‘인재경영’이라는 화두 아래서 이뤄진 작업이라는 것이다.
황 사장이 삼성에 합류한 것은 지난 89년.
부산 출신으로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미국 MIT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스탠퍼드대 연구원과 인텔사 자문으로 있다가 삼성으로부터 ‘천재급 인재’로 인정받아 반도체 개발 담당으로 스카우트 됐다. 하지만 직급은 부장급. 그 스스로가 임원급 대우 대신 현장 연구에 투입되는 부장자리를 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삼성에서 당시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임원자리를 제안했지만 내 임무는 ‘관리’가 아니라 ‘미래기술 개발’이었기에 연구개발을 위해선 실험실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수석부장으로 입사했고 그 후로 임원이 되는데 꼬박 3년이 걸렸다”고 입사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임원 혜택을 거절한 게 결과적으로 더 잘된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계약직으로 들어온 대부분이 중간에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94년 256M D램 개발팀장을 맡아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의 반도체 실력은 일본을 추월했다. 91년 진대제 사장이 주도했던 16M D램의 독자개발을 발판으로 역전극을 이뤄낸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02년 그는 ‘황의 법칙’을 주창하고 메모리 반도체 역사를 새로 써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구상을 지난 2000년 무렵부터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조직에서 친근감 넘치는 리더로 불린다고 한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가 삼성에 입사해서 주안점을 뒀던 것 중의 하나는 ‘토의문화’였다고 한다.
그가 회의를 주재할 때는 임원이 보고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것은 실무 분야의 부장과 과장. 그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 실권을 줘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그래서 삼성의 의사결정이 빠르다는 것이다.
‘디지털 노마드’(유목민)를 주창하는 그답게 빠른 의사결정을 이끌어내는 시스템 도입에 앞장선 것이다. 한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라고 격려하는 한편 그런 결정을 빠르게 도입하고 실천에 옮기는데 힘쓴 셈이다.
그것이 지난 94년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최초의 기념비적 반도체인 256메가 D램 개발을 주도했다. 70년대 미국에서 꽃피기 시작해 80년대 일본이 주도권을 쥐었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한국이, 삼성전자가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256M D램에서부터 삼성전자가 도시바를 추월해 나갔기 때문이다.
▲ 1년 전인 지난해 9월 황창규 사장(왼쪽)이 한국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대전 삼성전자 부스에서 웨이퍼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 ||
삼성전자가 황의 법칙을 실현할 때마다 황 사장이 직접 마이크를 쥐고 나선다.
그는 매끄러운 브리핑 실력과 서글서글하게 웃는 인상, 빼어난 영어실력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무대’에 자주 선다. 상대가 바이어건 외국인 투자가이건 그의 브리핑은 호평을 얻는다고 한다. 권위의식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친화력이 높다는 얘기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장점에 대해 “업무 특성상 비전을 만들고 변곡점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노력을 많이 한다. 토의는 자유스럽게 하지만 결정은 빨리 한다. 결정을 빨리 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답했다.
테니스와 골프가 수준급이며 해외 바이어를 상대로 한 영업실력도 뛰어나다.
그의 취미 중에는 새로 나오는 플래시 메모리를 채택한 전자 기기를 써보는 것도 있다. 얼리어답터인 셈이다. 이렇게 늘 첨단을 달려야 하고 ‘결정’을 해야 하는 그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악회에 가거나 골프를 치는 방법으로 해소한다고 한다. 그의 골프 실력은 싱글. 하지만 더 잘 치고 싶어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생긴다고 한다. 주말 골퍼의 공통된 고민에서 그도 예외가 아닌 셈이다. 일에 치여 사는 대한민국의 평균 가장답게 그 스스로 매기는 가장으로서의 점수는 60점이라고 한다.
특이할만한 점은 그가 공대생이었지만 ‘문기’가 강하다는 점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구한말 왕실 화원 화가를 지낸 황매선(黃梅仙) 선생. 황매선 선생은 매화 그림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황 사장이 잘 부르는 노래는 박인수·이동원이 부른 ‘향수’. 또 첼로 연주자인 장한나의 레코딩을 즐겨 듣고 무대를 직접 찾기도 한다.
그의 경력을 보면 삼성 입사 뒤 직선으로 쭉 달려나왔다. 거칠 것이 없이 2004년 반도체 부분 총괄 사장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게 라이벌이 있다. 바로 삼성전자의 사장단이 그의 라이벌이다.
거함 삼성전자는 반도체사업부, 휴대전화사업부, 디지털미디어사업부, LCD사업부, 생활가전사업 등으로 짜여져 있다. 이는 업계에서 최고의 포트폴리오로 꼽히고 있다. 삼성전자 전성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휴대전화가 경기의 저점을 달리고 있으면 반도체 사업부가 경기의 고점에서 조 단위의 순익을 내고 LCD사업부와 디지털미디어 사업부도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문제는 최근 들어 삼성전자의 새 선장 하마평이 나돌고 있는 점이다.
삼성전자에서 최고봉은 이건희 회장이다. 그 밑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최고의 자리는 윤종용 부회장이다. 지난 97년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윤 부회장은 2000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 10년 가까이 삼성전자의 간판으로 회사를 이끌어왔다. 그의 나이는 올해 63세. 때문에 ‘포스트 윤종용’에 대한 하마평이 무성하다.
포스트 윤종용의 후보는 당연히 삼성전자 각 사업부의 사장일 것이고 이중 반도체의 황 사장과 휴대전화 사업부의 이기태 사장이 가장 도드라진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때문에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두 사람을 곧잘 비교하고 있다. 32기가 낸드플래시 발표회 때도 이 사장에 대한 평가를 그에게 묻는 짓궂은 질문이 따라붙곤 한다. 삼성전자 내에서 반도체와 휴대폰 사업부의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8월 말 이기태 사장은 삼성이 원천기술을 확보한 4세대 이동통신 기술인 와이브로를 세계 최초로 실현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향후 10년 내에 삼성이 주도권을 쥔 이동통신 기술이 미국 등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실현돼 삼성전자가 세계 통신기술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마자 열흘 만에 황 사장이 7년째 황의 법칙을 실현한 40나노 32기가 낸드플래시 반도체를 선보였다. 이번엔 ‘CTF’란 신기술을 채용해 삼성이 향후 특허기술료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며 기술독립 선언도 겸했다.
삼성의 대표적인 사업부분의 수장들이 장군 멍군을 부른 셈이다. 이런 치열한 내부경쟁을 통해 삼성전자는 세계 최고의 전자회사로 떠오른 셈이고 삼성전자는 누구를 수장에 앉힐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황 사장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