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에 이색저색 섞으니 까매지네
▲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를 놓고 국회가 공전을 거듭하자 제1야당 원내사령탑인 김형오 원내대표에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7일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장의 김 원내대표. 뒤에 어렴풋이 강재섭 당대표의 얼굴도 보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런데 이런 갈등의 본질적 배경에는 원내사령탑인 김형오 원내대표의 역할과 책임이 자리잡고 있다. 대여 협상을 총지휘하고 있는 김 대표로서는 여야의 장기 대치 국면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번 헌재 소장 임명 파동이 그의 정치력을 테스트하고 있다. 김 대표는 평소 합리적인 성향이었지만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여당으로부터 “원내대표를 사퇴하라”는 압력까지 받고 있다. ‘비둘기파’ 김형오 대표가 전효숙 후보자 임명 파문에 대해서만은 ‘매파’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면을 따라가 봤다.
우리나라 정당의 원내대표는 간단한 자리가 아니다. 특히 17대 국회 들어 야당인 한나라당의 원내대표직은 중진들의 ‘무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덕룡 의원은 지난 2004년 말 ‘행정도시법-과거사법 빅딜설’ 파문으로 그 이듬해인 2005년 3월 원내대표직에서 중도하차했다. 김 의원은 결국 7개월만에 낙마한 뒤 부인의 지방선거 불법 공천헌금 수수 사건으로 지금은 사실상 정치계를 떠난 상황이다.
그 뒤 강재섭 원내대표가 배턴을 이어받았지만 그 역시도 수난을 겪었다. 한나라당의 블랙홀로 불리는 사학법 재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여당의 강행 처리를 막지 못했던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 수행 10개월 만인 지난 2005년 12월 말 단상을 내려왔다.
그 뒤 이재오 의원이 “여당에 사학법 재개정 약속을 받아내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하지만 이 대표도 결과적으로 사학법 재개정에 실패했기 때문에 ‘원내대표 불명예 퇴진’과 그에 따른 부담으로 대표최고위원 경선에서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두고 보면 한나라당의 역대 원내대표 3명 모두 제대로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김형오 원내대표는 어떨까. 불행하게도 김 대표도 ‘선배’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 대표는 취임한 지 불과 2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처리라는 또 다른 ‘블랙홀’을 만났다. 이번 사태가 점점 여야의 타협 없는 정면 충돌 양상으로 악화되면서 그의 흰머리도 더욱 늘어날 조짐이다.
김 대표는 평소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과 함께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대표적 정책통으로 인정받아왔다. 그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가 1978년 강영훈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의 눈에 띄어 외교안보연구원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공직에 입문했다. 그 뒤 전두환 대통령 시절 4년, 노태우 대통령 밑에서 4개월 등 오랫동안 청와대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그는 지난 1992년 14대 총선(부산 영도)에서 민자당 공천을 받아 여의도에 첫 입성한 뒤 줄곧 정보통신 관련 상임위에서 활약, 국회 내 대표적인 ‘정보과학통’으로 꼽힌다. 그는 특히 오랫동안 정부의 불법 도·감청에 대해 관심을 보여 ‘미스터 도·감청’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김 대표는 지난 98년부터 자신이 끊임없이 주장해온 ‘국민의 정부’의 불법도청 의혹과 휴대폰 도청 의혹이 지난해 8월 국정원의 고해성사로 모두 사실임이 확인돼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 사무총장 시절 박근혜 당시 당대표와 숙의하는 김 원내대표. | ||
나는 그런 게 취향에도 안 맞고 정치 발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드나들지 않았다. 평소에 안 가는데 추석이나 설날엔 더더욱 못갔다. 주변에서 왜 집에 안 찾아가느냐, 그러다 공천 못 받는다고 걱정해주더라. 그래도 아직까지 정치생활을 해온 비결이라면 내가 누구에게도 아첨을 못 했지만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신세진 게 없어 배반할 일도 없었지만…. 초선 때부터 그저 내 일만 열심히 했는데 몇몇 기자가 그걸 좋게 봐서 의정활동에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던 것 같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는 최병렬 대표가 선출된 2003년 6월 대표 경선에서 6명 후보 가운데 최하위로 낙선하는 아픔도 맛봤다. 하지만 2004년 3월 탄핵 후폭풍 속에서 사무총장을 맡아 박근혜 전 대표의 ‘오른팔’로 부상하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난 7월 실시된 원내대표 경선에서 유력 주자였던 김무성 의원을 비교적 여유 있게 누르고 원내 사령탑에 올랐다.
그를 잘 아는 한 동료의원은 “김 대표는 무리를 하지 않는 정치인이다. 어찌 보면 무색무취한 사람이다. 누구에게 아부를 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를 배신하지도 않는다. 상당히 지혜로운 사람이다.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줄 세우기 풍토가 만연한 한나라당에선 희소가치가 있는 정치인으로 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인품도 온화하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여당에서는 한나라당 내 대표적 비둘기파인 김 대표 체제가 들어서자 여야 관계가 이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질 것이라며 긍정적인 기대도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김 대표가 전 후보자 파문과 관련해 “그의 자진 사퇴만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며 한 치의 양보 의사도 없이 강공으로만 밀어붙이지 여당도 적잖게 당황하는 눈치다. 이는 최근 열린우리당 유은혜 부대변인이 그에게 보낸 ‘공개 서한’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유 부대변인은 “상식수준에서 ‘대한민국 제1야당의 원내대표’는 ▲자질과 능력 ▲협상력과 신뢰성 ▲당내 권력투쟁으로 국회가 파행되는 극단적 상황을 막아낼 소신이 있어야 한다”고 밝힌 후 “이런 점에서 김 원내대표는 열린우리당과 야 3당, 심지어 한나라당 내에서조차 부적절하다고 의심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국민들은 김 원내대표를 한나라당 ‘진짜 대표’의 책상 내리치기 면박 한 번에 야 3당의 중재안을 휴지통에 구겨 넣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께서는 협상과 합의의 정신을 지키고 국회정상화를 도모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제1야당의 대표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고 지적했다.
▲ 경선 뒤부터 내재해온 강재섭-이재오 두 세력 간의 권력갈등이 이번 ‘전효숙 파문’을 더욱 꼬이게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8일 의원총회에 참석한 강재섭 당대표, 김형오 원내대표, 이재오 최고위원(오른쪽부터). | ||
A 의원은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지난 경선에서 친박 계열로 분류되었음에도 이명박 계보의 전략적 협조 덕분으로 원내대표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이 김 대표에게는 부채의식을 주었을 것이다. 김 원내대표는 전효숙 후보자의 절차상 문제가 처음 불거진 초기만 해도 인사청문회를 거쳐 국회 본회의 표결처리를 검토하는 등 온건론을 견지했으나 이재오 최고위원이 전 후보자의 자진사퇴 또는 대통령의 지명철회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강하게 압박하자 강경론으로 급선회 한 것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김 대표는 원내대표로서 자기주장이 없고 강력하게 밀고 나갈 힘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또 다른 관계자는 훨씬 강도 높게 김 대표를 몰아붙인다. 정치권에서 오랫동안 몸 담아온 이 관계자는 “김 대표는 82년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해온 민정계다. 그러면서도 15대 때는 민주계의 도움으로 공천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계보에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할 줄 모르지만 일부에서는 ‘정치적 소신이 없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내가 볼 때 그는 ‘겸장선생’(장기를 둘 때 양수겸장으로 두 가지 기회를 동시에 엿본다는 뜻)인 것 같다. 지혜로운 것인지, 기회주의적인 것인지는 국민들이 평가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또한 “김형오 대표가 자신의 잠재력과 인기 때문에 원내대표직에 오른 것이 아니라 박근혜 대세론을 경계했던 의원들이 김무성 탈락의 역 선택을 했기 때문에 운 좋게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 대표가 정치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김덕룡 강재섭 이재오 전 원내대표 때처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란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표 측은 이에 대해 “당내 일부에서 김 대표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오락가락이라는 말은 솔직히 좀 받아들이기 어렵다. 최선의 합의를 도출해 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여당에 일부 양보도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보인 것뿐이다”라고 반박하면서 “이것은 어떤 사안은 되고 어떤 사안은 안 되는 문제가 아니다.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사건이기 때문에 절대 양보를 해줄 수 없다.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절차적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전 후보자가 자진 사퇴를 하든지, 임명을 철회해야 문제가 풀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김 대표 측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한나라당에서 원내대표를 지낸 한 의원도 이에 대해 “원내대표는 기본적으로 국회가 희생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회가 원만하게 돌아가는 것이 원내대표가 할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회가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을 속으로 바란다. 그러나 결국에는 의원들의 총의를 물은 결과대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김 대표의 행보가 오락가락했다는 것은 결국 여당과 합의를 이루어내기 위한 ‘전술적 행보’였음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한편 한나라당을 출입하는 한 기자는 “이번 사건의 핵심은 전효숙 후보자 처리에 있어서 오락가락한다고 비판을 받았던 김 대표에게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조순형 의원의 말 한마디에 원칙 없이 대응했던 한나라당 전체가 헛발질을 했던 데에 있다. 이는 김 대표에게 쏟아지는 무소신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한나라당에 만연돼 있는 ‘원칙 없는 발목잡기’의 뒤끝에서 나온 무한 소모전, 그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지금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처리를 두고 김형오 원내대표는 고민에 빠져 있다. 그는 과연 임기 도중 차례로 낙마한 ‘선배’들의 전철을 밟을까, 아니면 이를 원만히 수습하고 성공한 원내대표로 명예롭게 단상을 내려갈까. 그의 정치력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시험을 받고 있다 할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