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 제일 큰 사람’ 이번엔 뭘 삼킬까
▲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 | ||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100점 짜리가 될 수 있다.”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사장의 말이다.
진대제라는 사람은 반도체 전문가로 국내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세계 으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삼성전자 사장,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을 맡아 ‘최장수 장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첫 번째 얘기는 지난 연말 대학생들 모아놓고 한 강의에서 한 얘기였고, 두 번째는 몇 년 전 대한상의 초청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이 두 마디의 말은 동어반복에 다름 아니다. 시험 치고 노력해서 이루지 못한 게 없는 진 사장의 인생을 함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그에게 좌절이 있었다면 지난해 경기도 지사 선거에 나섰다가 떨어진 것이다. 선거라는 대형 대중 이벤트에서 그는 분패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관이 바뀐 것은 없다. 목표가 없으면 열정도 없다는 얘기처럼 그는 선거 뒤에도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라는 벤처캐피털을 만들어 벤처 발굴, 지원에 나섰고 방송통신위원회 등 이런저런 통신 관련 모임 하마평에 늘 영순위로 오르고 있다. 여전히 정력적으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그를 향한 정치권과 재계의 러브콜은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진 사장은 경남 의령 출신이다. 대구에서 경북중을 졸업한 그는 서울로 상경해 경기고를 나와 70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빠듯한 집안 살림을 하는 집에서 난데없이 나온 시골 수재.’ 진 사장이 딱 이런 경우다.
어릴 때 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던 그는 어머니가 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살리는 집안에서 산에 가서 땔감용 나무도 해오고 어렵게 살았다. 지역명문이던 경북중학교에 다니던 그에게 부친이 공고에 진학하라고 권유할 정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 사는 집에 얹혀 살기로 하면서 경기고에 진학했다. 서울에서도 그는 서부이촌동 철거민촌, 성남 등 달동네 주민들이 재개발에 썰물처럼 밀려가 살던 동네를 전전하며 살았다.
입주과외 등을 하며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국비장학생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정상 비행을 시작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삼성전자 사장 출신이라는 엘리트 기득권층이라는 선입견을 꺼려서 그런건지 그는 ‘사회에 대한 부채감’을 드러내곤 한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첫 정통부 장관으로 가게 된 계기에 대해 “삼성전자 사장 할 때 딴 생각 안했거든요. 어디 장관 되어보기 위해서 로비 해본 적 전혀 없고요. 근데 갑작스럽게 하여간…. 뭐 여러 사람이 추천해서 정통부 장관으로 최적임자라고 하니, 와서 좀 하세요…. 그날 전화 받고 그날 임명장 받고 그날 일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장관이 되면서 300억 원대의 기회 수익(?)을 버렸다고 한다. 스톡옵션을 포기한 것. 그가 최고의 기업인 삼성전자 사장에서 공익근무(?)를 받아들인 이유는 ‘사회에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아주 어렵게 살았고 국가로부터 장학금도 받고 국비유학생으로 유학도 하고, 그래서 기회가 오면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왼쪽부터 진대제 전 장관의 대학 시절. 삼성 시절 세계 최고속 알파칩을 개발했을 때 회사가 만들어준 전화카드. 지난 연말 노 대통령과의 ‘재회’ | ||
“두고 보십시오. 반도체분야에서 일본을 집어삼켜버릴 겁니다.”
교수는 놀라움과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미쳤냐? 농담이겠지!”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후 과학원의 김충기 교수에게 이 일화를 말했더니 김 교수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 네가 이 세상에서 목구멍이 제일 큰 놈이로구나!”
진 사장은 IBM에서 삼성으로 갈 때, 그리고 삼성에서 잘나가는 반도체 부분을 맡다가 적자투성이인 디지털 미디어 부분을 맡을 때 그때마다 주위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몸을 움직여 새로운 일을 맡았고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엔지니어에서 경영자로 성공적으로 변신했고, 관료로서도 합격점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의 최장수 장관을 기록할 만큼 신임도 받았고 성과도 이뤘다. 정부 내 평가에서 정통부가 일 잘하고 혁신 잘한다고 뽑히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대권후보로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엔지니어에서 경영자로 변신하는 순간에 대해 “임원직으로 올라갔을 때도 반도체 핵심설계 감수를 계속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회의 중에 직원들이 나보다 더 잘하더라. 그때 물러나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선거에 좌절을 맛본 그는 지금은 다시 경영인으로 돌아왔다. 지난 연말 벤처회사를 발굴해 키우는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라는 회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회사 이름 ‘스카이레이크’도 그의 ‘공익적 사고’가 묻어 있다.
진 사장은 삼성전자 반도체부문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지난 99년 12월 그때 삼성이 만들어낸 ‘1기가 D램’과 ‘1기가헤르츠 알파칩’을 백두산 천지에 바치기 위해 백두산에 올랐다. 비록 눈보라 때문에 천지까지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는 그런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카이(하늘 天)-레이크(못 池). 앞으로 10년, 20년 뒤 한국을 먹여살릴 벤처기업을 발굴해 지원하는 벤처캐피털 회사에 ‘스카이레이크’라고 이름 붙인 것도 그런 사고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하다. 얼마 전 하이닉스반도체 차기 사장 후보로 거론될 당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의 하이닉스가 있게 한 임직원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하이닉스가 일류기업으로 가기 위해 산적해 있는 현안을 해결하는 데 진대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삼성전자 최고위직이었다는 점에서 경쟁업체인 하이닉스 최고경영자로 가는 것에 대해 우려의 시각도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삼성은 삼성이고, 나는 나다. 삼성에 매여 있을 이유가 없으며 삼성과는 별 상관없는 문제다”고 정리했던 바 있다.
진 사장은 하이닉스 차기 사장 선정을 앞두고 후보 자진사퇴 의사를 밝혀 주변을 놀라게 했다. 하이닉스 노조의 반대도 있었지만 진 사장 본인이 하이닉스행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급작스런 사퇴가 노조 반대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의 친정인 삼성과의 ‘이견’이나 더 큰 ‘다른 목표’설정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는 한 강연회에서 “목표가 없으면 열정도 없고 목표는 너무 멀거나 가까우면 안된다. 그리고 통상 할 수 있는 것보다 높게 책정하고 3년 뒤에 결과를 볼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는 게 좋다”고 얘기했다.
‘세상에서 목구멍이 제일 큰 놈’ 진대제. 그가 어떤 성취를 보여줄 지 지켜볼 일이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