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설 곳은 오직 빅리그 마운드뿐
▲ 박찬호가 마이너리그에서 최근 3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는 등 회복세를 보이면서 후반기 빅리그 복귀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 ||
지난 3월 뉴욕 메츠의 스프링 캠프에서 만난 박찬호(34)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지난 겨울 FA로 풀린 후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지 못해 난항을 겪던 그는 에이전트 교체라는 강수 끝에 NL 동부조의 강호로 부상한 아주 괜찮은 팀인 메츠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60만 달러라는 기본 연봉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작년에 샌디에이고에서 보여준 능력이라면 메츠의 선발 로테이션에서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지난해 박찬호는 장출혈로 수술을 받고 시즌을 일찍 접은 아쉬움 속에 샌디에이고에서 21게임(구원까지 총 24게임)에 선발로 나서 7승7패에 4.8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9이닝 완투 능력도 보여주었고 6년 만에 4점대의 평균자책점을 보였다. 그리고 큰 수술을 받고 2개월 만에 포스트시즌 마운드에 복귀하는 초인적인 의지도 과시했다.
그러나 메츠에서는 당장 기용할 수 있는 베테랑 선발을 원한 반면에 박찬호는 투구폼까지 바꿔가며 완벽한 부활을 노렸다. 양측의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통상 노장들은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를 정규 시즌을 위한 가벼운 워밍업 정도로 여긴다. 겨울 오프시즌 동안 녹이 슨 부분을 닦아내고 이런저런 테스트를 해보면서 정규 시즌을 준비하는 정도다. 박찬호는 거기다가 포심패스트볼 위주의 정통파 투수로의 복귀를 노리면서 투구폼까지 수정하는 어려운 과정을 선택했다.
결국 시범경기 부진으로 선발진에서 탈락하고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는 것에 동의한 박찬호는 부단히 재기를 노렸지만 투구폼을 바꾼다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아니 사실은 새로운 동작에 적응하는 데 한 시즌 이상이 걸릴 수도 있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 대목은 박찬호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과대평가를 했거나 너무 큰 목표를 잡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박찬호는 노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의지력이 있고 또 대부분 노력한 것을 이뤄왔다. 그러나 나이와 부상, 수술 등을 감안했을 때 강속구 위주의 투구폼으로의 복귀는 쉽지 않은 목표였다.
▲ 케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그리고 박찬호는 서너 번의 시험 등판을 거쳐 합격점을 받으면 빅리그의 선발 기회를 준다는 조건으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지난 세 게임 연속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기록하는 회복세를 보이면서 후반기 빅리그 복귀라는 희망을 안고 있다.
미국 초년병 시절 마이너에서 그를 지도했던 버트 후튼이 현재 휴스턴의 트리플A 라운드록 익스프레스의 투수코치로 있다는 인연은 박찬호의 회복에 큰 힘이 되고 있다.
휴스턴으로 옮기면서 한 인터뷰에서 박찬호는 “메츠에 있을 때와 경쟁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발 로테이션이 아주 탄탄한 팀이 있는가하면 불안한 팀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팀들은 긴 시즌을 끌어갈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다.
애스트로스는 6일 현재 37승49패로 NL 중부조 5위에 떨어져 있다. 그런데 선발진은 어느 정도 제 몫을 해주고 있다. 올스타전에 나가는 에이스 로이 오스왈트와 좌완 완디 로드리게스, 부상에서 돌아온 제이슨 제닝스, 부진에서 회복세인 노장 우디 윌리엄스와 신예 크리스 샘슨까지 모두 제자리들을 지키고 있다.
박찬호의 빅리그 복귀는 이들 중에 누군가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거나 부상으로 뛸 수 없게 돼야 가능한 시나리오다. 아니면 마이너에 더 이상 둘 이유가 없을 정도로 호투를 계속하면 가장 부진한 투수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스트로스가 페넌트 레이스에서 탈락권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점은 악재다. 만약 시즌을 포기하게 된다면 일부러 노장 박찬호에게 후반기 선발 한 자리를 맡길 이유가 없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젊고 유망한 투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물론 휴스턴이 박찬호를 내년 시즌까지 안고 간다는 결정을 내린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현재 애스트로스의 투수 코치로 있는 데이브 월라스 역시 다저스 시절 박찬호의 은사고, 그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해 휴스턴은 박찬호와 계약을 맺었다. 그런 인연들과 함께 본인이 꾸준한 능력을 보여준다면 후반기에 빅리그에서 뛰는 박찬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박찬호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 지난 2월 메츠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한 박찬호. 그는 ‘코드’가 안 맞는 메츠를 떠나 휴스턴 산하 ‘라운드록 익스프레스’에 둥지를 틀었다. AP/연합뉴스 | ||
박찬호에게는 아직도 자신감이 있고 꿈이 있다. 빅리그에서 충분히 재기할 수 있고 앞으로 몇 년은 더 10승대 투수로 던질 수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한다. 사실 작년에 보여준 능력이라면 빅리그에서 10승을 거두는 것이 크게 무리한 목표도 아니었다. 다만 당시의 것들을 고수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아쉬움으로 남는다.
희망적인 부분은 후튼 코치, 월라스 코치와의 재회다. 다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박찬호가 ‘빅리그에 선발 투수로 빨리 복귀한다’는 점에만 매달리다보면 오히려 그 시기가 늦춰지거나 혹은 앞으로 다가올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애스트로스의 퍼퓨라 단장은 박찬호가 선발로만 뛰겠다는 조건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누가 평가를 내리든 박찬호는 한국이 배출한 최고 투수 중의 한 명이다. 특히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투수 중에는 단연 발군이고 IMF로 전 국민이 힘겨워 할 때 희망을 주었던 영웅으로서의 상징적인 이미지도 대단히 크다. 그런 박찬호가 이런 식으로 야구인생을 흐지부지 끝낸다는 것은 팬들도 원치 않고 본인도 당연히 원치 않는 일이다.
박찬호가 국내에 선수로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의 무대에 다시 서겠다는 본인의 목표와 의지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그건 어쩜 야구 선수로서의 능력을 떠나 박찬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만약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야구 생애를 끝내게 된다면 박찬호의 화려한 야구 커리어의 마지막이 너무 초라해진다. 그래서 본인의 고뇌와 마음고생은 더욱 심하겠지만 그럴수록 의지를 더욱 불태우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박찬호는 이미 큰 돈을 벌었고 부와 명예와 단란한 가족까지 운동선수가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뤘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 100승 투수이자 최초의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자존심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는다면 올 시즌보다 내년이나 후년이 더욱 좋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전에 올 시즌 빅리그에 복귀해서 썩 괜찮은 후반기를 보내는 것이 필수지만 말이다.
미국LA=민훈기 메이저리그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