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대접해준다면 시애틀에 남고 싶다”
이대호가 내년에도 시애틀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사진은 이대호가 지난 17일 시애틀의 시택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일일지점장 행사를 갖는 모습.
정규시즌이 마무리돼 갈 무렵 미국에서 만났던 이대호는 기자와 자신의 상황과 내년 시즌에 대해 허심탄회한 얘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먼저 ‘도전’은 한 번뿐이라고 못 박았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시애틀과의 마이너리그 계약을 수용했던 데에는 그 자체가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수비에 대해 불안한 시선이 있다는 걸 알고 체중 감량을 통해 수비 훈련에 대비했고, 스프링캠프에서도 타격보다는 수비 훈련에 치중하면서 이대호가 수비도 되는 선수라는 걸 보여주려 노력했다. 플래툰 부분도 감수했다. 왜냐하면 내가 팀의 시스템을 모르고 들어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신분은 1루수 백업 선수였다. 프로 선수로 생활하면서 1년차 때 외엔 백업 멤버로 뛴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수용했던 건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플래툰 시스템은 이대호의 발목을 잡았다. 홈런과 안타로 빼어난 성적을 올려도 다음날 오른손 투수가 나올 경우 스캇 서비스 감독은 어김없이 아담 린드를 선발 라인업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즉 한창 타격감이 살아나는 상황에서도 상대 투수가 오른손이냐 왼손이냐에 따라 이대호는 경기 출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부분은 시즌 막판 이대호의 타격감을 떨어트리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시애틀이 플래툰 시스템으로 1루수를 가동한 결과 어느 선수가 더 좋은 성적을 냈을까. 승자는 주전이었던 아담 린드가 아닌 이대호였다. 이 내용은 시애틀 지역 언론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전스>에서 자세히 소개했다.
신문은 ‘2016 매리너스 시즌 평점’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시애틀 주요 선수들의 올 시즌을 평가했고, 이대호도 그 대상이었는데 신문이 평가한 평점은 ‘B-’였다. 타율 0.253(292타수 74안타), 14홈런 49타점을 기록했고, 전반기 때는 타율 0.288에 12홈런 37타점을 올리기도 했다. 반면에 아담 린드는 타석에서의 인내심 부족으로 타율이 저조했다며 ‘C-’를 줬다. 린드는 올 시즌 타율 0.239(401타수 96안타) 20홈런 58타점을 기록했다.
제한된 기회 속에서도 이대호는 꾸준히 성적을 냈고, 올스타전 전후로 손바닥 부상을 당하며 잠시 슬럼프에 빠졌다가 마이너리그를 경험한 이후 바닥을 치고 올라서려 했지만 플래툰 시스템으로 인해 좀처럼 타격감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 부분이 이대호로선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대호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야구장으로 출근해서 제일 먼저 확인하는 일이 배팅 오더였다. 전반기 때는 내 이름이 없는 게 서운했고, 후반기 때는 오히려 이름 없는 걸 확인하고선 마음 편히 대기타석을 준비했던 것 같다. 잘 아시다시피 내 보직은 백업 멤버였다. 그 자리가 내 자리였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출전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메이저리그에서 인정받는 아담 린드에게 내 존재가 경쟁이 되었다면 내 임무는 어느 정도 완수한 것이다.”
만약 이대호가 플래툰이 아닌 주전으로 계속 경기에 출전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추신수가 이에 대해 답을 줬다.
“대호가 시애틀이 아닌 다른 팀의 주전 선수로 뛰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홈런과 더 좋은 타율을 기록했을 것이다. 1루수를 맡기엔 체구가 큰 편이지만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팀이나 1루가 취약한 팀을 알아본다면 이대호가 메이저리그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본다. 난 대호를 계속 메이저리그에서 만나고 싶다.”
이대호는 지난 17일 시애틀의 시택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일일지점장으로 행사를 가졌다. 시애틀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는 아시아나항공 승객들을 맞이한 것이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아시아나 수속 카운터 앞에서 서울행 아시아나 승객을 대상으로 플로어 서비스와 사인을 해주며 승객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는 등 일일 지점장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 이대호가 이날 현지 취재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얘기를 전했다. 시애틀 <미디어한국>이 기자에게 전달한 내용에 의하면 이대호는 시애틀에 남고 싶다고 말했다. 기사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인 여러분들이 1년 동안 많이 응원해주셔서 미국 생활 탈 없이 마무리 잘할 수 있었다. 이달 말에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시애틀 생활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 매리너스와의 계약문제가 성사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인들과 상의도 하고 가족들과도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한다. 내년에도 시애틀과 좋은 기회를 만들어보겠다.”
이대호가 시애틀과 좋은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말한 배경에는 가족들이 존재한다. 아내 신혜정 씨는 시애틀 생활에 크게 만족했다. 특히 처음 자리를 잡으며 고생할 때 자신을 도와준 주위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면서 그들이 그리워서라도 시애틀을 떠나기 아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시애틀 밸뷰란 지역의 유치원에 다니는 딸 효린이도 유치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고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한국 친구도 있어 시애틀 생활을 즐기는 상황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대호는 시애틀과 재계약 맺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메이저리그 공식홈페이지는 물론 <시애틀타임스> <타코마 뉴스 트리뷴> 등은 시애틀이 아담 린드를 떠나보내고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할 경우 이대호를 붙잡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대호로선 이번에도 백업 멤버의 조건이라면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기자에게 처음 말한 내용처럼 도전은 한 번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31일 귀국하는 이대호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정리해서 발표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