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는 늘 신발끈 풀지 말아야 해
▲ 한국시리즈 우승 후 며칠 지나지 않았음에도 김성근 SK 감독은 벌써 내년 시즌을 준비하겠노라고 말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드디어, 마침내, 비로소’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게 된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65). 우승 직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합동기자회견을 마련했을 정도로 초절정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 감독의 모습이 다소 생경스러웠지만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우승 이전, ‘잡초 인생’을 대변한 김성근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1자가 셋이나 겹친 11월 1일 아침, 김성근 감독과 전화 인터뷰를 나눴다.
양지보다는 음지, 중심보다는 주변인의 모습으로 기억된 김성근 감독이 드디어 프로야구계의 중심부에 우뚝 섰다. 선동열 감독도, 김경문 감독도 그리고 김인식 감독도 원했던 그 자리에 선수들과 함께 앉게 된 것이다. 한국시리즈 6차전이 끝나고 선수들이 뿌린 샴페인에 흠뻑 젖은 김 감독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의외로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오히려 기자들에게 “고생했다”고 먼저 악수를 청하는 모습에 잠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아침 일찍부터 우승 뒤풀이 행사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는 김성근 감독에게 우승을 만끽할 틈도, 여유도 없었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승하고 나니까 더 바쁜 것 같다.
▲이런 일(우승 행사)이 나랑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고마운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라 기쁜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승 직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였나.
▲선수들이었다. 시즌 전부터 마무리훈련과 동계훈련, 스프링캠프 등 쉼 없이 달려왔다. 하루도 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SK만큼은 제대로 만들어가고 싶었다. LG시절 막 뭔가를 이루려다가 잘리는 바람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SK에선 제대로 ‘점’을 찍고 싶었다. 그 ‘한’이 분명 있었다. 덕분에 선수들만 고생했다.
―정규리그 내내 SK는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였다. 일찌감치 1위를 내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팀의 견제와 질시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왕따보단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1위 팀에 대한 견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팀 감독의 어필에 개의치 않았다. 남 얘기 듣고 흔들릴 만한 나이도 아니고…. 하지만 상대 팀의 단점을 찾기 전에 자신이 맡고 있는 팀의 장점을 끌어올리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시즌 내내 빈볼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난 자유로웠다. 주위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묻고 싶다. 빈볼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투수는 몸쪽 공을 던지는 게 필수다. 몸쪽 공으로 승부해야 생존해나갈 수 있다고 봤고 그래서 투수들에게 몸쪽 공을 던지는 연습에 주력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선수들의 감정에 의해 고의로 상대 타자를 맞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SK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을 때는 단 한 마디도 안 했다. 한국시리즈 3차전 때 정근우가 이혜천의 볼에 맞았을 때도 항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재현에게 또 몸에 맞는 볼이 나가고, 그래서 그땐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빈볼 시비가 불거지고 몸싸움이 일어나고…. 과연 누구에게 득이 되고 실이 될까. 난 빈볼 시비가 불거질 때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 한국시리즈 우승 뒤 SK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을 헹가래하고 있다. | ||
▲난 시즌 초 선수들 교육 때마다 상대 투수의 공에 맞아도 쓰러지지 말고 걸어 나가라고 주문했다. 만약 쓰러진 선수가 있으면 바로 바꿔버릴 거라고 엄포를 놨다. (빈볼에 쓰러지는 건) 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더욱이 오버 액션으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게임 흐름이 끊겨버린다. 경기가 재미없어진다. 미국에서도 빈볼에 맞은 선수가 쓰러지는 일이 거의 없다. 고의냐 아니냐는 팬들이 더 잘 안다. 지나치게 (빈볼에) 집착하는 건 자기 무덤 자기가 파는 꼴이다.
―올 시즌 유독 베테랑 선수들의 부대낌이 많았다. 물론 이름값으로 야구하는 걸 싫어하는 감독 영향을 받은 탓이지만 고참 선수들 중에 불만을 토로하는 선수도 있었다.
▲억울하면 더 많이 연습해서 기어 올라와야지, 패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과거에 잘했다는 건 ‘과거형’이다. 오늘부터 잘한 게 아니지 않은가. SK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건 2007년 10월 29일로 끝났다. 지금부턴 과거의 우승팀이 아닌 2008년을 준비하는 SK로 새로 시작해야 한다. 박경완은 경기 앞두고 연습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올해는 완전 달라졌다. 박재홍은 이번 시즌을 치르면서 어마어마한 내적 성장을 이뤘다. 아마도 그 친구 가슴에 무지무지한 게 들어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진영은 많이 안타까웠다. 기회를 더 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솔직히 선수들을 혹독하게 대한다는 게 쉽지 않다. 때론 등 두드려주고 안아주면서 격려해주고 싶을 때도 있지만 감독이나 선수가 센티멘털해지면 그 조직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평소 선수를 ‘자식’이라고 자주 언급했다. 아들 입장에선 너무 엄격한 아버지가 부담스런 존재일 것 같다. 재미도 없고.
▲난 내 ‘자식들’을 버려두지 않았다. 방치한 척하면서 거리를 두고 지켜봤다. 자신의 실수를 실수로 끝내지 않고 그걸 극복해 내는지 유심히 살폈다. 극복해내는 선수에게는 기회를 더 줬다. 못난 자식, 잘난 자식 모두 내 아들들이다. 그들에게 모두 똑같은 기회를 줘야 한다. 거기서 살아남는 자식들을 데리고 가는 거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선수는 자신의 이름값에 우쭐대며 안일하게 사는 놈이다.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김재현 선수도 시즌 초에는 너무 힘들어서 야구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선수가 포기한다면 할 수 없지만 자신이 야구 그만두고 사회에 나가서 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야구만 해온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나. 또 사회에서 연봉 2억~3억 원 받기가 쉬운가. 3000만 원 벌기도 어려울 것이다. 일본에서 이승엽 같은 선수도 시합 끝나고 개인훈련으로 1000개 가까이 공을 친 다음에 퇴근했다. 이병규도 한국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야구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너무 쉽게 야구를 하려고 한다. 더 단단해져야 한다.
―너무 자신을 혹독하게 다룬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오랜 시간 우승을 목표로 힘들게 달려왔다면 며칠 정도는 쉬면서 스트레스를 털고 새롭게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리더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냉정해야 한다. 내가 여유를 갖고 놀고 있으면 관리가 안 된다. 리더는 멀리 봐야 한다. 나도 사람인데 쉬고 싶고 놀고 싶을 때가 없었겠나. 리더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보냈을 것이다.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간절했었나.
▲만약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 했다면 옷 벗고 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혹독하게 선수들을 이끌어 왔는데 막판에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염치로 선수들을 보겠나. 걱정, 불만, 하소연, 속상함, 외로움… 이런 모든 것들이 우승을 향한 염원 하나로 모아졌다. 만약 SK가 우승 못했다면 탈이 나도 크게 탈이 났을 것이다.
▲ 지난 29일 한국시리즈 우승트로피를 들고 관중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 ||
▲그 사람은 9승이지? 정말 대단하다. 쉽게 이룰 수 없는 업적이다. 난 그렇게까진 못할 것이고…. 우승의 맛이라? 아직 그런 맛을 느껴볼 여유가 없었다. 난 페넌트레이스보다 한국시리즈가 훨씬 편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단기전이라 더욱 긴장해야 했는데도 편하게 마음먹었다.
―선수들은 김성근 감독을 굉장히 엄하고 강한 사람이라고 본다. 실제도 그런가.
▲원래 김성근이란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강한 척할 뿐이다. 난 아직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미숙한 게 너무 많다. 어제 밤에 책을 읽었는데 고 이병철,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를 소개한 내용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인생을 ‘대충’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루 24시간 중 단 1%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난 선수들에게 그런 모습을 원한다. 연습량이 많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전에 1%만 부족해도 많은 걸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연습하다가도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중간에 끝내버릴 때가 있다. 그게 365일 모이면 그 팀은 안 되는 팀이다.
―‘김성근의 야구는 일본 야구다’ ‘김성근의 야구는 미국과 일본야구를 뒤섞은 ‘짬봉야구’다’ 하는 평가들이 있다. 자신의 야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웃으면서) 김성근 야구는 그냥 김성근 야구다. 미국, 일본, 이런 것보다는 그 팀의 선수 구성에 맞춰 야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데이터 야구 신봉자로 알려져 있는데 데이터는 야구에서 가장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다. 오늘 4타수 4안타 쳤다고 해서 내일 또 다시 4타수 4안타 치란 법이 없지 않은가. 리오스한테 강한 타자가 렌들에게도 강하기 어렵다. 난 어제의 기록을 오늘의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11월 8일부터 시작되는 일본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에서 일본 우승팀 주니치 드래곤즈와 맞붙게 됐다. 이병규 선수와의 대결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데 각오를 밝힌다면.
▲지바 롯데 시절 코치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올해는 감독으로 출전하게 돼 감회가 새롭다. 창피는 당하지 않도록 해보겠다.
김성근 감독이 처음 SK 사령탑에 앉을 때만 해도 부정적인 시각이 훨씬 많았다. 특히 수석코치로 데려온 이만수 코치와 김 감독의 색깔이 너무 다르다며 ‘어색한 동거’ 운운했었다. 5년 동안의 야인 생활을 청산하고 프로팀 감독으로 다시 발을 들여 놓은 김 감독의 출발선에는 이렇듯 선입견을 가진 시선들만이 가득했다. 불과 1년 만에 자신을 향한 ‘억지’들에 대해 제대로 뭔가를 보여준 김 감독. 이번 한국시리즈 우승은 그한테 우승 그 이상의 의미가 잔뜩 포함돼 있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