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리는 그녀의 마술 물 올랐다
더구나 영화가 개봉된 지 얼마 안 돼 남녀 핸드볼 대표팀이 일본을 이기고 베이징올림픽 출전권 따냈다. 영화만큼이나 극적인 핸드볼 팀의 승전보로 <우생순>은 2008년의 ‘국민적 영화’로까지 주가가 상승하고 있다. <우생순>이 갖는 의미는 배우 김정은에게도 남다르다. 그에게 이 영화는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기 위한 첫 걸음이자 자신의 삶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화려한 집안 배경
배우를 시작하기 전 김정은은 좋은 집안의 잘 교육 받은 아가씨였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집안은 재계에서도 내로라하는 명문가 집안. 김정은의 작은 외할아버지는 제18대 제일은행장을 거쳐 한국외환은행장, 한국은행 총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후 이수그룹 명예회장직으로 있다 작고했으며 작은외삼촌 역시 현 이수건설 회장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김정은이 이수건설의 브라운스톤 전속 모델로 활동하기 전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주어진 배경을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개척하려고 했던 김정은의 의지 때문이다.
김정은은 영화 <아찌 아빠>에서 ‘나가요 걸’로 출연하며 범상치 않게 배우의 삶을 시작했다. 그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1998년 MBC 드라마 <해바라기>의 정신과 환자 ‘문순영’ 역할을 연기하면서부터다. 당시 김정은은 역할을 위해 삭발까지 감수하는 열연을 펼쳐 주목받았는데 삭발한 김정은의 모습은 평소 그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고 한다. 김정은이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평범한 모범생이었기 때문.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었던 김정은은 본연의 모습을 과감히 버렸다. 1996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남장여자 소매치기(<여인천하>), 냉정하지만 코믹한 저격수(<재밌는 영화>) 등 평범하지 않은 역할을 선택했다.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예쁜 여자가 ‘제대로’ 망가지는 김정은만의 코믹 캐릭터가 완성된 것은 영화 <가문의 영광>. 물론 흥행 면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 연예인 같지 않은 스타
김정은을 최고의 스타로 만든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도 그는 가난하지만 당차게 살아가는 ‘강태영’ 역을 거부감 없이 그려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인형처럼 예쁘거나 톡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이 청순하지 않은’ 외모 덕분인지 그는 현실감 있는 현대판 신데렐라를 그려내면서 시청자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파리의 연인> 덕분에 김정은은 톱스타 반열에 합류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CF를 10여 개 이상 찍으며 기염을 토해냈다. 김정은의 후속작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고 대중은 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김정은을 진정한 스타로 만든 건 작품 속 그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정은은 대중에게 여배우가 저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다가갔다. 실제 김정은과 작업해본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그를 ‘연예인 같지 않은 연예인’이라고 평가한다. 김정은은 언제 어디서나 분위기 메이커를 자청하며 스태프들과도 허물없이 지낸다고. 스태프들 사이에서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배우’로 불릴 정도다. <파리의 연인>을 함께한 한 스태프는 “배우들은 보통 촬영에 들어가면 예민해져서 자신만 챙기기에 급급한데 (김)정은 씨는 아무리 힘들어도 주변 사람들을 먼저 챙긴다”고 말한다. 스타 의식에 젖지 않는 배우로도 유명하다. ‘뜨면 변하는’ 여느 스타들과 달리 김정은은 한결같다는 게 주변 관계자들의 설명. 기자들 사이에서도 카메라 앞보다 뒤가 더 좋은 대표적인 연예인은 전도연과 김정은이 손꼽힐 정도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오랜 시간 노출된 김정은은 ‘대중의 외면’이라는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그는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지만 활동하는 시간만큼 지독한 슬럼프에 시달려야했다. ‘만인의 연인’이라는 이미지는 김정은을 옭아맸고 CF를 통해 굳어진 모습은 쉬이 탈피할 수 없었다.
상황은 <파리의 연인> 이후 좀처럼 후속작을 정하지 못하던 김정은이 드라마 <루루공주>를 선택하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김정은이 드라마에서 자신의 실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판 공주’ 고희수를 연기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드라마는 조기 종영됐고 배우 입장에서 열악한 드라마 촬영 현실에 목소리를 높였다가 대중의 매서운 뭇매도 맞았다. 물밀듯이 쏟아지던 CF가 하나 둘씩 끊겼고 김정은도 다른 배우들처럼 한때 인기 있었던 그저 그런 배우로 대중의 기억 속에 남는 듯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연기력으로 평가 받기 위해 스스로 개런티를 낮춰가면서 작품성 있는 영화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연한 몇몇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김정은을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그는 그 과정도 자신이 성장하는 과도기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김정은은 인터뷰에서 “2005년은 나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며 당시를 회상하고는 “스스로 <사랑니>와 같은 작품을 선택하면서 틀을 깨기 위해 애썼다”고 말한다.
<우생순> 역시 김정은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문소리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와 대적을 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결정이었던 데다 기존의 코믹한 이미지가 오히려 진지한 모드의 영화 <우생순>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고민했던 것. 하지만 김정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머뭇거리지 않았고 관객들은 그 도전에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다.
@ 연기파 배우로 재조명
김정은이 영화 <우생순>에서 도전한 역할은 아줌마 핸드볼 선수다. 진짜 선수처럼 보이기 위해 5kg이나 살을 찌웠고 운동선수 못지않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기본기를 다졌다. 어찌 보면 연기를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김정은이 ‘누구 집 딸’ ‘어떤 이미지의 배우’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본격적인 걸음마를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김정은은 특유의 클로즈업 신 없이도 캐릭터를 잘 녹여냈다. 부스스한 머리에 맨얼굴을 보면 예쁘게 보이고 싶은 생각은 애당초 없었던 듯 보인다. 김정은은 또한 오버하거나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튀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영화 곳곳에 보인다.
물론 <우생순>을 찍으면서 그가 포기한 부분도 많다. 두터워진(?) 몸매와 예쁨을 포기한 여배우가 CF 스타로서 전성기를 다시 누릴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걱정의 소리까지 들을 정도다. 그러나 김정은은 배우로 살아가는 지금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리고 섣부른 칭찬이나 이유 없는 비난은 자제해달라고 부탁한다. 김정은의 한 측근은 “그동안 코믹한 이미지 때문에 연기력에 대해서는 저평가됐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배우로 재조명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뿌듯해하고 있다”는 얘길 전한다. 김정은은 여전히 연기에 목말라있다면서 말이다.
홍재현 객원기자 hong92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