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뛰든 10분 뛰든 ‘산소탱크’ 전력 가동
▲ 아시아선수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을 노리는 박지성. 그라운드에서 그의 맹활약을 기대해 본다. AP/연합뉴스 | ||
지난 11일 밤(한국시간) 2007-2008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후 박지성(27·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아버지 박성종 씨에게 전화를 걸어 우승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지막 경기까지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다가 67분 만에 라이언 긱스와 교체되긴 했지만 박지성은 이번에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 현장에서 메달도 수여받고 우승컵에 입을 맞춰봤으며 라커룸에서 샴페인 파티를 즐기는 등 선수들과 뛰고 뒹굴었다.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공식 인터뷰에서 ‘맨유가 더블 우승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던 박지성은 오는 22일 새벽(한국시간) 유럽 프로축구 클럽 대항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을 앞둔 상황에서 올시즌 마지막 우승만을 남겨 두고 있다.
월드컵보다 더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챔피언스리그. 아시아 선수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을 노리는 박지성은 2005년 7월 맨유 입단을 앞두고 출국하기 전 기자와의 인터뷰 때만 해도 “돈 많이 받고 군대 가는 심정”이라며 세계 최고 명문 클럽으로 입단하는 데 대한 심적 부담을 이렇게 표현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시간의 흐름만큼 수많은 일들이 박지성을 둘러싸고 벌어졌지만 박지성은 2008년 5월, 맨유 일원으로 러시아 모스크바 루츠니키스타디움을 찾았고 그 역사적인 현장에 존재해 있다.
맨유 입단 직전부터 맨유에서 뛰고 있는 현장, 그리고 부상과 수술 등 부침을 겪고 난 이후의 상황에서 박지성과 인터뷰했던 내용을 토대로 축구선수 박지성과 스물일곱 살 청년 박지성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2005년 7월 6일 오전 10시, 인천공항 주차장에서 만난 박지성은 당시에도 엄청난 인기 광풍에 힘입어 잇따른 CF 촬영과 지면광고 촬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낸 뒤 예정보다 일찍 영국으로 떠나는 상황이었다. 출국 전 <일요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박지성은 일본, 네덜란드, 그리고 새로운 무대, 프리미어리그를 접하는 소감에 대해 이런 심정을 나타냈다.
“솔직히 일본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갔어요. 일본에서 축구한다는 자체가 너무 좋았거든요. 네덜란드는 일본 갈 때보다는 부담이 덜했어요. 감독님도 아는 분이고 자신감도 있었고요. 가장 두렵고 떨리는 곳이 지금 가는 프리미어리그예요. 이전의 두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일 것 같아서죠. 내 어깨에 놓인 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박지성은 당시 가장 걱정되는 부분에 대해선 “방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꼽았다. 그러면서도 “만약 노력했는데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면 다 받아들이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2005년 10월 영국 맨유의 캐링턴 훈련장에서 다시 만난 박지성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인터뷰하기 전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인저리타임에 단 1분을 뛰었던 그는 축구를 시작한 이래 경기에서 1분만 뛴 것은 리버풀전이 처음이었지만 1분이든 10분이든 경기에 계속 나갈 수만 있다면 만족한다는 입장이었다.
“네덜란드에 첫 발을 내딛을 때도 전 주전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어요. 월드컵 4강을 이루고 온 동양 선수였을 뿐이죠. 여기도 비슷하지만 그래도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에인트호번 시절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골을 넣었다는 사실이에요. 그걸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박지성한테 동료들의 엄청난 ‘스타파워’에 스스로 위축된 적이 없는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박지성은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 지난 11일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
2007년 4월, 박지성은 오른 무릎 부상으로 잠시 그라운드를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상황에서 이메일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의 질문 중에서 여자친구의 존재가 가장 절실히 필요할 때가 언제냐는 물음에 “내가 힘들 때 친구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힘들고 외로울 때는 이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낄 때”라며 에둘러 표현했다. 귀국할 때마다 가끔씩 소개팅을 받은 적이 있지만 ‘관리 소홀’로 발전된 관계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2008년 신년인터뷰 때는 우리나라 나이로 스물여덟 살이란 걸 강조하면서 새해 소망으로 “부상없이 축구하는 것, 우리 가족의 건강, 그리고 지금은 비어있는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여자친구가 생길 경우 “있는 데 없는 척하진 않겠지만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일반적인 삶을 살지 않는 남자와의 결혼으로 인해 여자 분이 많은 부분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들을 인내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박지성은 올시즌을 앞두고 무릎 부상과 수술로 9개월가량 그라운드에서 자취를 감춰야 했다. 지난 12월 27일 선더랜드전에 복귀하며 270일 만에 모습을 선보인 그는 주전 자리 확보에 대해 자신보다 언론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맨 처음 맨유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라이언 긱스의 존재로 인해 내 자리가 보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1분이든 5분이든, 출전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긱스보다 더 훌륭한 선수가 온다고 해도 그 선수로 인해 내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봐요. 워낙 게임 수가 많기 때문에 리저브에 들든, 잠깐 5분을 뛰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아침 9시30분에 훈련장으로 출근해서 12시30분이면 퇴근하는 일상들. 경기 없는 날엔 이런 시간들이 반복되면서 박지성은 축구 외에 혼자 지내는 시간들이 많다. 대부분의 휴식 시간을 어머니와의 수다, 축구 게임, 독서, 인터넷으로 소일하는 스물일곱 살 청년에게 지금의 삶은 ‘수도승’의 삶과 다름없다. 이런 지적에 대해 박지성이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물론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 놀고 싶을 때가 더 많다. 영국 생활이 너무 외롭고 단조로워서 지겨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축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지금 여기에 올인하지 못하면 박지성의 축구 인생은 ‘후회’란 단어로 점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일 긴장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내 생활에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변화의 주인공이 여자친구라면 더더욱 좋겠다(웃음).”
박지성이 뛰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현장에는 그의 부모도 관전할 예정이다. 지난 15일 한국에 머물던 아버지가 영국으로 출국했고 어머니 장명자 씨와 함께 20일쯤 모스크바로 들어갈 계획이다. 박지성의 말대로 1분을 뛰든, 10분을 뛰든, 아니면 풀타임을 뛰든, 박지성이 모스크바의 그 경기장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축구를 통한 감동과 전율이 월드컵 4강 진출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걸, 박지성을 통해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