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추락 쓴맛 내 인생엔 ‘플러스’
▲ 평균 150㎞의 강속구를 날리며 부활에 성공한 박찬호. 그는 지난 겨울 허리강화 훈련을 한 게 구속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 전문기자 | ||
박찬호는 지난 오프시즌 LA 다저스에 컴백하려고 노력했다. 에이전트에게 조건없이 다저스에 입단할 수 있도록 협상할 것을 주문했다.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다저스 문을 두들겼다. 결국 메이저리그가 보장되지 않는 마이너리그 계약으로 다저스 베로비치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 7년 만의 다저스 복귀였다. 메이저리그 엔트리에 합류하면서 받는 연봉이 50만 달러다. 2년 전 수령한 연봉이 1550만 달러였다. 박찬호에게는 돈 액수보다 메이저리그 잔류가 절실했다.
당시 많은 팬, 전문가들은 ‘돈도 많이 벌었는데 왜 구질구질하게 현역 생활을 연장하려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2007년 박찬호의 구위는 메이저리그에 복귀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었다. 직구 구속, 변화구의 각 등이 배팅볼 투수에 가까웠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시대도 저무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박찬호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사실 운동선수에게 돌연 은퇴는 난감한 처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은퇴에 대비할 경우 옷을 벗은 뒤 제2의 인생 설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준비가 없을 때는 다소 막막하다. 돈이 많다고 모든 게 해결될 일은 아니다.
박찬호에게 야구는 직업이다. 일반인들이 직업을 쉽게 버릴 수 없듯이 박찬호도 메이저리그 야구인생을 쉽게 접을 수가 없는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직업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은퇴 후 서울 강남 건물의 사장으로 출퇴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지금 상황이라면 은퇴를 해도 구상한 게 있을 테니 순조로울 수 있다. 재기에도 성공해 명예도 회복한 상태다. 박찬호는 이미 지난해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이제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그러던 그가 지난 5월 불펜에서 기대 이상의 호투를 하고 구위를 거의 정상으로 되찾았다. 그때 기자가 선발에 대한 욕심이 없느냐고 물었다. 박찬호는 “왜 없겠느냐. 그렇다고 불만을 터뜨릴 수도 없다. 내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지난해 부진했고 현재 모든 게 회복된 것이 다저스에 몸담으면서 이뤄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본인의 노력으로 재기에 성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다저스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가능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게 박찬호의 진심어린 말이다. 박찬호와 다저스는 찰떡궁합인 모양이다.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박찬호는 2007시즌을 앞두고 다저스를 포함한 서부쪽 프랜차이즈 팀에 잔류하고 싶어했다. 텍사스 레인저스로 선뜻 팀을 옮겼던 총각 시절과는 달랐다. 결혼도 했고, 부양가족이 있어 LA에서 이동이 쉬운 곳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시애틀 매리너스 계약설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박찬호의 에이전트는 스콧 보라스. 서부 프랜차이즈 팀과 계약하고 싶다는 박찬호의 요구를 묵살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보라스는 제프 위버를 먼저 시애틀과 계약시켰다. 박찬호가 보라스와 결별한 결정적 사유다. 결국 에이전트를 제프 보리스로 바꾸고 뉴욕 메츠와 인센티브 계약을 하며 2007시즌은 그렇게 지나갔다.
박찬호의 현 거주지는 LA 서부 바닷가쪽의 마리나 델레이다. LA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은 한국과 다름없이 편하게 산다. 박찬호도 나이가 들면서 LA의 편안함을 잘 알고 있다. 경기 후 배가 출출하면 한인타운 순두부집에 들러 내 집처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다저스타디움에서 한인타운은 20분이 채 안 걸린다.
LA에서는 자연인 박찬호로서의 생활도 만끽하고 있다. 낮 경기 때나 경기가 없는 날에는 집에서 딸 예린과 하루종일 뒹굴며 쏠쏠한 삶의 재미를 느낀다. 시도 때도 없이 깨어나 가끔 밤잠을 설쳐 다음날 야구장 가는 데 지장을 받기도 하지만 결혼 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삶의 일부다. 딸을 두고 있는 박찬호는 현재 부인이 둘째를 임신 중이다.
박찬호의 올시즌 피칭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게 직구 구속이다. 평균 150km의 강속구를 꾸준히 뿌리고 있다. 반짝이 아니다. 매 경기 지속적으로 150km의 볼이 측정된다. 올시즌 재기에 결정적인 변수가 됐음은 물론이다.
본인은 구속 회복 이유를 두 가지로 보고 있다. (다른 한 가지도 있는데 시즌 후에 말하겠다며 감추고 있다) 첫째는 건강회복이다. 운동선수가 건강 운운하는 게 다소 의외인데 만성 소장출혈이 2000년부터 간간이 발목을 잡았다는 게 박찬호의 짐작이다. 박찬호는 2006년 8월 샌디에이고에서 소장출혈을 막기 위해 메켈게실 수술을 받은 바 있다. 소장에서 피가 새어나와 가끔 감기가 걸린 듯 몸이 찌뿌듯하고 체력이 저하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특히 고도가 높은 콜로라도 덴버를 갈 때마다 이 증세가 반복됐다고 한다. 수술 후 이런 점은 완전히 제거됐다.
둘째는 겨울훈련 때 허리강화를 한 게 구속 복원에 결정적이었다. 박찬호는 지난 2001년 다저스 시절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다. 허리가 좋지 않다는 점을 의식해 하체강화에만 주력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겨울 박찬호의 개인트레이너 이창호 씨가 허리강화 프로그램을 추천했다. 스쿼트(역기를 어깨에 메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운동)를 135kg까지 올렸다. 그동안에는 허리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훈련이었다.
박찬호는 “트레이너로부터 하체 힘은 좋은데 허리 힘이 약하다는 말을 들었다. 볼을 완벽하게 채지 못하고 밀어서 던지는 듯한 것도 바로 허리를 이용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 트레이너의 조언에 따라 허리 보강훈련을 한 게 큰 도움이 됐다”며 구속 회복은 허리강화와 직결됐음을 밝혔다.
▲ 지난해 겨울 사회 복지법인 ‘신망원’ 어린이들을 위해 선물을 나눠주고 있는 박찬호(왼쪽). 2006년 ‘해외 입양인 고국 방문을 위한 사랑의 바자’에 참석한 모습. | ||
시즌 초반 토리 감독과 릭 호니컷 투수코치는 박찬호를 신뢰하지 않았다. 롱맨으로서 역할을 제한했다. 롱맨은 선발투수가 일찍 무너졌을 때 또는 불펜에서 긴 이닝을 던져야 할 때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다. 불펜투수 가운데 가장 빛이 나지 않는 투수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걸레질을 한다는 뜻의 mop-up맨이라고도 한다. 박찬호도 이에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5월 31일 뉴욕 메츠전에서 2사 만루상황에 등판해 시즌 두 번째 구원승을 따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박찬호는 경기 후 “코칭스태프가 나를 믿어주고 누상에 주자가 있을 때 불러준 게 고맙다”고 했다.
박찬호의 현 구위를 고려하면 다른 팀에 가서 제4선발급은 무난히 맡을 수 있다. 평균자책점도 줄곧 2점대 이하를 지키고 있다. 경험도 풍부하고 이미 불펜에서 안정된 구위를 자랑했고, 두 차례 선발등판에서도 완전히 재기에 성공했음을 과시했다. 올해 3경기에 선발로 나섰다. 다저스 코칭스태프도 박찬호가 선발감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팀 사정상 불펜투수로 활용할 수밖에 없다. 다저스는 현재 체질개선중이다. 팀을 젊은 선수 중심으로 바꾸는 과도기다.
토리 감독이 박찬호에게 선발 기회를 주는 게 인색한 이유도 구단의 방침에서 비롯된다. 20세의 좌완 클레이턴 커쇼를 올리고, 트리플A에서 에릭 스털츠를 불러온 게 이와 무관치 않다. 커쇼는 구단에서 집중적으로 키우는 투수로 투구이닝 제한을 두고 있다. 한 달에 25이닝을 넘지 않도록 조정한다.
박찬호도 이런 팀 사정을 알고 있어 굳이 선발을 고집하지 않는다. 선발을 택하려면 다른 팀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불펜에서의 투수 생활을 매우 현실적이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야구공부에는 많은 도움이 된다. 솔직히 아쉬운 점은 있지만 요즘은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는 몰랐던 선수들의 경쟁도 많이 배웠다. 예전에는 나만 잘하면 됐지만 지금은 내가 잘했을 때 다른 선수가 엔트리에서 빠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해는 희망이 없었는데 올해는 잘해서 기회를 잡았고, 갈수록 좋은 기회를 얻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스스로 달라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예전과 달리 불펜에서 다른 선수들의 구질을 보면서 지금 당장은 저 구질을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불펜에서 바라본 박찬호의 소감이다. 줄곧 선발투수로 활동하다가 불펜투수로 전업하면서 느낀 게 남달랐다.
박찬호는 올해 성공적인 재기로 내년 시즌도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두었다. 본인이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면 모를까. 선발로 복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찬호는 여전히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기를 원한다. 돈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의 상징성도 갖고 있어 한 투구 한 투구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역사다. 그러나 팀은 어디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박찬호도, 에이전트도 모른다. 다저스에 잔류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서부 프랜차이즈에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문상열 LA라디오서울 메이저리그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