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민’의 연기엔 ‘김명민’이 없다
▲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노력형 천재 지휘자 강마에 역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김명민. 그는 명품 지휘를 위해 촬영 석 달 전부터 매일 2~6시간씩 피나는 연습을 했다고. | ||
새로운 히어로 ‘전문직 천재’
드라마 <하얀거탑>의 성공 이후 배우 김명민의 캐릭터는 전문직 종사자, 그것도 천재적인 실력까지 겸비한 전문직 종사자다. 드라마 <하얀거탑>과 영화 <리턴>에서 연이어 천재적인 엘리트 외과의사 역할을 소화한 김명민은 영화 <무방비도시>에서 최고의 검거율을 자랑하는 베테랑 엘리트 형사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번엔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선 천재적인 지휘자로 시청자들 앞에 섰다.
과거 할리우드가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를 등장시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면 오늘날 한국 방송가는 천재적인 실력을 겸비한 전문직 종사자를 21세기형 히어로로 시청자들에게 내놓은 셈.
할리우드에선 대중들이 히어로에 열광하는 까닭을 현실에 대한 실망과 불만 때문이라 분석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면 히어로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대표적인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인 슈퍼맨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8년, DC코믹스의 출판 만화를 통해서였다. 참고로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의 늪에 빠져있던 시절이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 아니 전 세계의 현실은 실망스럽기 그지없고 불만스럽기 짝이 없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서 발발한 금융 위기는 이제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됐고 대한민국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가는 1200선까지 무너졌고 환율은 한때 1500원대에 육박하기도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점차 늘어가고 실업자도 급증하고 있다.
▲ 사진제공=MBC | ||
게다가 극중 강마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잘 조련해 훌륭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낸다. 어쩌면 신음하는 국민들을 제대로 이끌어줄 지도자에 대한 로망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나쁜 남자에 열광
여자들은 종종, 아니 자주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고 얘기한다. 착한 남자들 입장에선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이지만 강마에를 보면 살짝 이해가 되기도 한다. 강마에는 나쁜 남자다. 여자의 마음은커녕, 그 누구의 마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일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쁜 남자다. 그럼에도 극중 두루미(이지아 분)는 마음이 흔들리고 이 드라마를 보는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도 흔들린다. 남성 시청자들 역시 강마에의 매력에 동요되곤 한다. 그만큼 나쁜 남자의 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김명민이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 이성 교제가 쉽지 않은 이들이라면 본보기로 삼아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다만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도 있다. 여성 시청자들이 까칠한 나쁜 남자 강마에에게 열광하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남성 시청자들 역시 그의 매력에 이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만 그의 매력을 본받아 여성을 유혹하는 데 써먹기 위해서일까.
정말이지 그는 거침이 없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최고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그의 항변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거침없는 나쁜 남자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관객 여러분, 대통령 내외분! 졸리시죠? 당연합니다. 방금 들은 연주는 쓰레기입니다. 당장 주최 측에 가서 환불 받으시고 그 돈으로 브람스 CD 사서 들으세요. 저는 더 이상 브람스를 이 따위 연주로 더럽힐 수 없습니다. 집에 가서 샤워들 하시고 특히 귀에 때를 빡빡 밀어주시기 바랍니다.”
▲ <리턴> 속 엘리트 외과의사 류재우(왼쪽)와 <무방비 도시> 속 베테랑 형사 조대영 역. | ||
이런 김명민의 모습에 남성 시청자들이 열광하고 있다. 금융 위기로 시작된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직장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남성들, 가장들, 아빠들 역시 이처럼 거침없이 할 말을 하고 싶어 한다. 누구나 까칠하게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사회는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이런 세상의 얼개 속에서 힘겨워하는 오늘날의 남성들이 거침없이 까칠한 극중 강마에, 배우 김명민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대중과 거리 좁힌 클래식
모두 아홉 개인 베토벤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일반에 잘 알려진 것은 3번 영웅, 5번 운명, 9번 합창 등이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기이하게 별도의 명칭도 붙어있지 않는 7번 교향곡이 한국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바로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영향이었다.
음반 업계 관계자들 역시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이 수록된 <노다메 칸타빌레 O.S.T> 앨범의 판매기록에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경이적인 판매 기록은 아니지만 기존 클래식 음반 시장에서 볼 땐 놀랄 만한 수치였다. 일본에서 인기리에 반영된 드라마 한 편이 한국의 클래식 음반 시장의 판도를 움직였다니 실로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클래식 역시 100여 년 전까지는 대중들이 즐기던 음악이었다. 다만 음악이 발전하면서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고립되기 시작한 클래식이 마치 부유층과 지식인층의 전유물인 양 치부돼 왔을 뿐이다.
결국 대중과 클래식의 거리는 인기 일본 드라마 한 편만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었을 만큼 멀지 않았지만 이를 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애초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를 따라한다는 비판에 휘말리기도 했던 <베토벤 바이러스>는 한국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클래식 명곡들을 앞세워 시청자들과 접촉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김명민의 힘은 대단했다. <노다메 칸타빌레>의 ‘치아키’ 타마키 히로시보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김명민은 훨씬 뛰어난 지휘 실력을 선보이며 대중들과 클래식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안내자 역할을 한 것.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은 클래식 음악의 본래 주요 무대이던 공연계는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부분이다.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기존 클래식이 경기 침체로 흔들리는 와중에 김명민이라는 명배우와 함께 브라운관을 통해 대중 곁으로 다가선 것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