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주치의’ 여의도에도 백신 뿌리게 될까
▲ PC계의 슈바이처 인터넷 대란이 터질 때마다 발 빠르게 백신을 내놓으며 컴퓨터 사용자들의 전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안철수 교수. 이번 디도스 사태 이후 또다시 주가가 급등하고 있다. | ||
안철수 교수의 주가가 급등하자 정치권에서도 그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실력뿐 아니라 대중적인 인기와 호감도 면에 ‘안철수’라는 이름은 계속해서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을 만한 매력적인 대상이다. ‘컴퓨터 전문가’이지만 그동안 의사, 박사, 교수, 칼럼니스트, 사장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치며 끊임없이 도전을 거듭해온 안철수 교수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봤다.
안철수 교수는 이번 ‘디도스 사태’를 겪으며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1999년의 CIH 바이러스 대란, 2003년의 인터넷 대란에 이어서 이번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피해가 큰 나라가 되었지만 사고가 일어난 후에도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이번 사이버 대란은 우리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사이버 보안, 더 나아가서는 국가적인 위험관리 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가 일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은 10년 전부터 국가 IT 예산의 10% 정도를 보안에 투자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불과 1%에 그치고 있다는 것. 디도스 사태 이후 가장 빨리 무료백신을 공급하고 좀비PC 파괴 위험성 등을 경고하며 발 빠르게 대처한 안 교수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호응하며 지지하고 있다. 일부에선 “차라리 안철수를 국정원장 시키자”며 정부의 방만함을 꼬집는 이들도 있을 정도.
그러나 사람들이 안철수 교수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컴퓨터 전문가’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걸어온 인생행로를 들여다보면 신념과 소신에 따른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인지 새삼 느껴지는 바가 크다.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난 안철수 교수는 서울대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를 받았다.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공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스탠퍼드대학 벤처비즈니스 과정과 고려대학교 기업지배구조 최고과정을 수료했다. ‘안철수 연구소’를 만든 지 10년 만인 지난 2005년에는 “더 배울 것이 남았다”며 전격적으로 CEO 자리에서 물러나 훌쩍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서 최고 경영자 MBA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온 뒤 현재 KAIST에서 비즈니스 이코노믹스 프로그램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시에 안철수연구소 CLO(Chief Learning Officer·최고학습관리자) 및 이사회 의장직을 겸하고 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안철수는 의사인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의대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의대 재학 중이던 1983년 겨울방학, 그는 컴퓨터와 운명적인 ‘첫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컴퓨터라면 중학교 때 신문에서 사진으로 본 게 전부였던 그가 룸메이트의 방에 있던 컴퓨터를 직접 보게 된 것. 매달 6만 원씩 받는 용돈을 아껴 쓰던 당시의 안철수는 그 신기한 ‘컴퓨터’라는 물건을 사서 뜯어보고 싶어 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더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컴퓨터는 앞으로 사회 어느 분야에서건 널리 쓰이게 될 물건이다. 지금 사서 꼭 공부를 해보고 싶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온종일 컴퓨터와 시간을 보내며 책을 보고 프로그래밍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안철수는 얼마 뒤엔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어 수없이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새로 나오는 컴퓨터 게임을 사서 다른 사람들과 해법을 연구할 정도의 ‘게임광’이 되기도 했다.
의대 박사과정 학생이던 1988년 어느 날 밤, 안 교수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접하게 된다. 갑자기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고 멈추어 버린 것. 그는 컴퓨터 잡지에서 읽은 작은 기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 기사는 ‘컴퓨터 바이러스’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이 팔리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컴퓨터 바이러스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던 상황. 의학을 전공하며 ‘바이러스’라는 용어와는 친숙했던 그는 이날부터 컴퓨터 바이러스를 고치는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고 ‘백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지난해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중소기업 성공전략회의에 참석한 안철수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 청와대사진기자단 | ||
경영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그는 회사를 설립한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 기술경영학을 공부하러 떠나게 된다. ‘안철수연구소가 실패하면 국산백신 프로그램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회사일도 병행해갔다.
사업가로서 그의 소신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는 보안업체인 ‘맥아피’사로부터 거액의 인수제의를 거절했던 일. 1997년 6월 맥아피 본사로 초청받아 찾아간 안철수 사장에게 빌 라슨 회장은 ‘1000만 달러에 회사를 사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안철수 교수는 “우리 회사는 팔 물건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안 교수의 생각은 ‘컴퓨터 보안 프로그램은 단순히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해커들이 한국 군사시설을 제어하는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퍼뜨린다고 가정했을 경우, 국내에 바이러스를 막을 기술이 확보돼 있을 때에만 정보전이 벌어져도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자 소신이다. 이는 최근 벌어진 ‘디도스 사태’에서도 여실히 증명된 바 있다.
당시의 파격적인 인수 제의를 거절했던 안 교수는 결국 자신의 신념에 따른 선택으로 갚진 결실을 얻게 된다.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소신 있게 회사를 일구어온 그는 10년 뒤 ‘매출액 100억’을 돌파하는 ‘안철수연구소’의 성공신화를 만들어 낸다. 안철수연구소는 ‘2000 올해의 정보통신중소기업 대상’, ‘매출 100억 원 돌파’(국내보안업계 최초, 2000년 12월) ‘코스닥 상장’(2001년 9월) ‘벤처기업대상 동탑산업훈장 수상’(2002년 10월) ‘순이익 106억 원 달성’(국내 소프트웨어 업계 최고기록, 2004년 12월) 등 승승장구했다.
‘디도스 사태’가 터지기 얼마 전 안철수 교수는 인기 오락프로그램인 MBC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다소 어눌하면서도 겸손한 말투로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많은 시청자들은 ‘이 시대의 지도자상’이라고 호응을 보냈다. 오래 전부터 그를 눈여겨봐온 정치권에서도 앞 다퉈 영입을 추진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그는 현재 대통령 자문기구인 ‘미래기획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이 토목공사보다 IT 산업 쪽으로 맞춰줘야 한다고 지적한 것. 그는 이 라디오방송 인터뷰에서 “토목 공사는 원자재가 많이 들고 인건비는 아주 일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토목공사가 인력비중이 크지 않다보니까 (일자리 창출 면에서) 비효율적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인력을 많이 활용할 수 있는 쪽은 IT 산업이다. 우리나라 인력구조와 가장 적합하다. 그래서 토목공사보다 이런 소프트웨어 쪽에 집중하는 것이 고급 인력들의 활용적인 측면에서 제대로 나아갈 방향이라고 본다”고 언급했다.
과연 정치권의 러브콜이 계속된다면 그도 언젠가 ‘정치인’으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될까. “정치는 혼자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던 그이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며 성공해온 인생사를 살펴보면 ‘정치인’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 가능성도 열려 있는 셈이다. 안철수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정치권 진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제가 예전에 의사 그만둘 때 그 생각을 했어요. 정말로 열심히 살다 보면 저는 나이 들어서도 환자를 열심히 진료하는 의사가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정말 매순간 열심히 살다 보니까, 의미 있고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면서 오히려 의사를 그만둬야 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저도 사실 충격적이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장기 계획은 오히려 안 맞는 사람이 아닌가. …오히려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다 보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을 해야 되는가 떠올리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미래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그런데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게 되는 거는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