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옅어 더 매력적
정 후보자는 10여 년 전부터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끊임없이 영입 제의를 받아왔고, 2007년 대선 과정에서는 민주개혁 진영의 대선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치권 주변에서 이른바 ‘정운찬 대망론’ 불씨가 지펴진 셈이다.
정 후보자는 2007년 4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추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당시 민주당 등 민주개혁 진영에서 정 후보자를 영입하기 위해 적극적인 구애의 손길을 내민 건 사실이지만 복잡한 대권함수를 감안하면 그가 범민주계 대선후보로 확정될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자칫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권에 이용당하고 이미지에 상처만 남긴 채 쓸쓸히 퇴장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세론을 구축했지만 지역적 기반과 확실한 정치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고건 전 총리가 스스로 대권열차에서 하차했듯이 정 후보자 역시 불확실한 승부를 접고 훗날을 기약했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진보·개혁 성향인 정 후보자가 일부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명박호에 승선한 배경에는 마음 한 구석에 품고있는 대망론을 펼치기 위한 나름의 대권 복심이 투영돼 있었을 것이란 관측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정 후보자는 충청 출신으로 비교적 지역색이 옅고 민주개혁 진영에서 대선주자 반열까지 올랐던 만큼 차기주자로서 잠재력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다소 이념적 괴리감은 없지 않으나 현 정부 총리직에 발탁된 정 후보자가 이 대통령을 도와 경제정책 등 각종 개혁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경우 ‘정운찬 대망론’에 날개를 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 후보자는 9월 3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정부와 정치적 관점이 일치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과거 2년 전 대선 후보로 거론된 적은 있지만 민주당 후보로 거론된 적은 없다. 출마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당시에 어느 당 후보로 나설 것이라는 생각을 밝힌 적은 없다”고 말해 과거 민주당 대선후보로 거론됐다는 점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었다.
‘총리 퇴임 후 대권 도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다. 대통령을 보필해서 경제를 살리고 사회통합을 이루는 게 우선이다”며 정치적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정치권 관계자들은 총리 발탁으로 정 후보자의 정치적 자산 가치가 급등하고 있는 만큼 향후 여야를 망라한 대선지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특히 여권 내부의 대권구도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행정 경험이 부족하고 정치적 리더십을 검증받지 못한 정 후보자를 여권의 차기주자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섣부른 판단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인지도가 높은 정 후보자가 총리직을 원활히 수행하면서 사회대통합 정책을 주도할 경우 정 후보자는 차기 대선판을 뒤흔드는 핵뇌관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열려 있는 상태다.
여권 일각에서는 오래전부터 친이계(친 이명박 대통령) 주류 내부에서 독주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할 ‘대항마’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던 만큼 정 후보자가 ‘박근혜 대항마’로 부상할 것이란 얘기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박 전 대표 측은 ‘정운찬 카드’에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내심 이 대통령의 정국 운영 구상 및 차기 대권 복심에 대해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2007년 대선 당시 정 후보자에게 끊임없는 구애 공세를 펼쳤던 민주당은 당혹스럽다는 반응과 함께 향후 정국 추이 및 대선구도에 미칠 영향력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이강래 원내대표는 “믿기지 않는다. 정 후보자에게 속은 것 같은 느낌”이라며 허탈해 했다. 노영민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정 후보자의 그동안 발언으로 비춰볼 때 대통령과 총리 둘 중 하나는 소신을 접어야 공존이 가능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비꼬았다.
정 후보자의 변심에 발끈한 민주당 등 야권은 벌써부터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철저히 검증을 벼르고 있다. 야권은 정 후보자가 아직까지 공개적인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논문 문제를 비롯해 재산, 병역, 정체성 논란 등 ‘송곳’ 검증을 통해 정 후보자의 이미지에 타격을 가한다는 전략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