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 야구’로 호랑이 등에 날개 달았다
▲ 조범현 감독 | ||
조 감독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60년대에 자가용을 굴리는 집이었으니 두 말이 필요없다. 그러나 조 감독의 기억 속엔 등 따시고 배부른 기억은 그리 길지 않다. 오히려 트럭의 한켠에 쪼그리듯 앉아 도망치듯 집을 떠났던 기억부터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야구를 시작하고 대구의 대건고에 진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이 해체됐다. 그 때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감독이 내려와 조 감독을 포함한 대건고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갔다. 그 사람이 바로 김성근 현 SK 감독이었다. 그 후 둘의 인연은 길고 질기게 이어진다. 소년 조범현도 전 소속팀 대건고도, 그리고 새로운 둥지가 된 충암고도 비주류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팀도 그도 조금씩 변해간다.
황금사자기 8강에서 탈락(당시 4강 이상 팀 선수만 대학 스카우트가 가능했음) 후 스파이크를 땅에 내리치며 “이제 대학은 어찌가노, 어찌가노” 하며 울던 아이 조범현은 두 달 뒤 봉황대기 우승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조범현은 OB베어스(현 두산)에 입단한다. 그 팀엔 또 다른 포수 김경문(현 두산 감독)이 있었다. 둘 다 공격보다 수비가 앞선 포수들이었다. 누가 더 낫다고 하지 못할 만큼 빼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다만 개성은 뚜렷했다. OB 감독으로 둘 모두를 지도한 바 있는 김성근 감독은 “김경문은 공격적인 리드, 조범현은 다양한 볼 배합을 무기로 했던 포수”로 둘을 기억하고 있다.
김경문은 여전히 깨지지 않은 포수 최고 수비율(.956) 기록을 갖고 있고 조범현은 도루 저지율 기록을 20년간 보유하고 있었다. 둘 다 수비가 강한 포수였지만 선수로서는 김경문이 좀 더 주목을 받았다. 불세출의 스타 박철순의 짝이었기 때문이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우승의 마지막 포옹을 나눈 것도 박철순과 김경문이었다.
조범현은 1991년 삼성으로 팀을 옮기고 2년 뒤 은퇴한다. 그리고 쌍방울로 자리를 옮겨 코치의 삶을 시작한다. ‘조범현’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전환점이었다. 그에겐 박경완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코치 조범현은 연습생으로 입단, 사실상 불펜 포수 역할을 하던 박경완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박경완이 기억하는 조범현 코치는 한마디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지도자”였다. 박경완은 매일같이 조 코치와 붙어지내며 포수와 야구를 배워간다. 그렇다면 당시 박경완과 조범현 코치는 무슨 대화를 나눴던 것일까.
박경완은 이렇게 설명했다.
“기록지 보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기록지에 나타나 있는 것은 누가 언제 뭘 했다 정도다. 그러나 그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걸 배웠다. 예를 들어 한 타자가 4타수 2안타를 쳤다고 하자. 첫 두 타석에선 안타를 쳤지만 나머지 두 타석에선 범타와 삼진이었다. 그럼 상대 투수를 보는 거다. 선발은 140km 중반이 넘는 빠른 공을 던지지만 변화구 구사능력은 떨어진다. 그러나 중반 이후 교체된 불펜 투수는 변화구가 다양한 투수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타자의 최근 컨디션은 변화구에 약점이 있는 거라 볼 수 있다. 또 변화구 투수 중에도 다양한 스타일이 있다.
슬라이더 투수, 포크볼 투수. 그런 특성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려간 뒤 전력 분석팀의 자료를 통해 정리해 두면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모기업의 부도로 쌍방울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결국 선수를 팔아 연명에 나섰고 이미 현역 최고 포수가 된 박경완은 1순위 상품이었다. 그렇게 박경완은 현대로 떠나게 된다.
▲ 12년 만의 우승..‘선장’ KIA 타이거즈가 9월 24일 전북 군산월명경기장에서 히어로즈를 꺾고 페넌트레이스 1위로 12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연합뉴스 | ||
그러나 코치 조범현을 박경완에게만 묶어두어선 안 된다. 그는 박경완이 떠난 뒤 장재중이라는 또 하나의 백업 포수를 당당하게 주전 포수로 만들어 낸다. ‘10년 만에 한번 나오는 포수’라는 평을 받았지만 껍질을 깨지 못했던 만년 유망주 진갑용을 최고 포수의 반열에 올려 놓은 지도자 역시 조범현 코치였다.
조범현 감독은 2003년 SK 감독으로 취임, 만년 하위권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이끄는 작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고참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면서도 젊은 선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하며 팀을 꾸려간다. SK 감독 4년간 두 번의 포스트 시즌 진출과 두 번의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데 전체적인 평가는 ‘합격점’ 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지나간 자리다. 조 감독은 젊은 선수들의 기용에 인색하지 않았다. 당장 눈에 띄는 아쉬움이 크더라도 꾹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보여줬다. 초짜 감독들이 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맘이 급하게 되면 일단 좀 더 성과를 낼 수 있는 선수들 위주의, 이름값에 얽매인 기용을 하기 쉽다.
그러나 조 감독은 미래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지 않았다. 정근우 김강민 조동화 등 이후 SK 전성기를 이끈 젊은 피는 그의 배려를 먹고 자라났다.
김성근 SK 감독이 2007시즌 우승을 차지한 뒤 “조범현 감독이 팀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고 떠난 덕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조범현 감독이 다져 놓은 기반은 그만큼 탄탄했다.
KIA 감독으로의 성공 역시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뚝심이 만들어 낸 결과다. 조 감독은 KIA 취임 뒤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전히 팀에 옛 해태의 영광만 기억하고 싶어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때만큼 전력이 되지 않는 팀에서 그때처럼 야구를 하려 하면 안 된다. 내가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그 부분만은 반드시 고쳐놓겠다.”
조 감독은 실제로 자신의 다짐을 실천에 옮긴다. 나지완 안치홍 등 가능성 있는 신인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다. 단순히 뛰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야구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이기는 길을 찾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주입했다.
만년 유망주 김상현의 폭발도 조 감독의 뚝심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수비가 불안해 공격력까지 장애를 받던 김상현을 영입한 뒤 그가 선수단에 지시한 것은 한 가지였다. “앞으로 김상현의 수비에 대해선 아무도 지적하지 말라.”
▲ SK 감독 시절의 조범현. | ||
길고 긴 암흑기를 겪었던 KIA는 조 감독 취임 2년 만에 당장의 전력은 물론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희망찬 팀으로 바뀌었다. 조 감독이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에 충실히 따른 결과다. 그리고 KIA의 성공은 이제 조 감독이 당당한 한국프로야구의 주류임을 알린 쾌거였다.
SK는 지난 2004년 의미 있는 프로젝트 한 가지를 구상한다. 조범현 감독이 직접 나서는 포수 클리닉이 그것이다. 아직 빈약하긴 하지만 타격이나 투수 부문에선 아마추어 선수들에 대한 교육이 나름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포수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배터리 코치를 따로 보유하고 있는 팀도 없고 그럴만한 여력도 없는 것이 한국 야구의 현실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잘못 배운 버릇을 고치지 못해 프로에서 고생하는 포수들이 무척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SK는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마케팅 차원에서 일을 추진하긴 했지만 현역 감독의 야구 클리닉은 여러 가지로 부담이 많은 일이었다. 그러나 조 감독은 흔쾌히 이벤트 참가를 허락했다. 이뿐 아니다. 직접 교재를 만들어 강의에 나서는 열성을 보였다. 성적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은 시기였지만 포수 클리닉에 대한 조 감독의 열정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가 꾸고 있는 꿈의 종착점과 닿아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조 감독은 늘 “은퇴하면 아마추어 포수들을 지도해주고 싶다. 포수가 왜 중요한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싶다. 그래야 한국 야구도 더욱 단단해 질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조 감독은 여전히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 꿈은 크게 주목받는 일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꼭 자신의 인생을 닮은 꿈을 꾸고 있는 이가 바로 조범현 감독이다.
정철우 이데일리 야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