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한 박한철까지 사찰에 머물러…재판 방해한 남성 퇴장당하기도
지난 석 달간 신문을 펼쳐도 텔레비전을 켜도 또는 거리를 나서도 ‘탄핵’을 빼놓고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가 탄핵소추를 의결한 뒤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92일이 걸렸다. 특히 지난 2월 28일 이후 국회와 특검에 집중된 시선이 헌재로 향하면서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그동안 심판정 문은 3차례 준비기일을 포함해 총 20차례 열렸다. 심판정에 선 증인은 25명, 헌법재판소 재판관들과 국회 소추위원, 박 대통령 대리인단이 검토한 검찰 수사 기록은 5만 3000쪽에 달했다. 사건의 중대성만큼 전무후무한 기록이 쏟아졌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뒷이야기들도 나왔다.
# 외부 접촉 끊은 재판관
‘대공지정’(大公至正·아주 공정하고 지극히 바름).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 탄핵심판 1차 변론에서 천명한 원칙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사건의 재판을 시작하며 재판관들의 다짐을 국민에게 알린 것이다. 박 전 소장의 다짐은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으로 이어졌다. 이 권한대행은 첫 진행을 맡은 10회 변론 시작부터 “심판 과정에서의 공정성, 엄격성이 담보돼야만 심판의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강조했다.
재판관들이 공정성을 지키려 애쓴 흔적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탄핵 심판 심리가 진행 되는 동안, 헌재 관계자들 사이에선 영화 <로마의 휴일>이 가끔 대화에 올랐다고 한다. 왕실 생활의 제약과 정해진 스케줄 등에 피곤해지고 싫증난 공주가 몰래 거리로 나와 만난 신문기자와 자유를 만끽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가 요즘 재판관들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재판관들은 국회 탄핵소추의결서가 헌재로 넘어온 뒤로 92일 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고 재판 진행과 기록 검토를 했다. 최종 변론이 끝난 이후에도 주말을 반납하고 평의를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재판관들은 외부 전화도 받지 않고 동창 모임은 물론, 가족 모임까지 취소했다. 지난 1월 31일 퇴임한 박한철 전 헌재소장마저도 한 사찰에 머물며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지난 2월 22일부터 재판관들은 심판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간에서 사복 경찰 3~4명이 따라붙는 근접 경호를 받았다. 헌재 안팎의 말을 종합하면, 일부 재판관은 주변에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집 앞 슈퍼마켓 가기도 부담스럽다” 또는 “교회에 갈 때도 경호원과 함께 가야 하느냐”며 난감해했다고 한다.
기록 검토를 위해 이른 오전 출근한 재판관들은 점심과 저녁은 구내식당이나 배달된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변론이 열리는 날엔 식사 시간도 아껴가며 재판에 몰두했다. 헌재 구내식당 관계자는 “한창 재판이 진행 중일 땐 많이 바쁘신 것 같았다. 입맛도 돌지 않으신지 예전보다 많이 잡수시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심리 초반엔 일부 재판관이 주변 눈을 피해 혼자 인근의 단골 식당에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재판이 진행될수록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고 한다.
헌재 안팎에선 재판관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말들도 나왔다. 정해진 퇴근 시간도 없었고,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기록을 보다가 보따리나 쇼핑백에 서류를 넣어 귀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판관들의 표정도 탄핵 심판 초기와 비교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몸무게가 줄거나, 불면이나 두통에 시달리는 재판관도 있었다고 한다. 한 헌재 관계자는 “재판관들이 많이 지쳐 있었다”며 “특히 이 권한대행이 법정에서 쓰러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이 권한대행은 지난 2월 22일 16차 변론에서 박 대통령 측 변호인단이 “헌재가 국회 편을 들고 있다”는 등 재판부를 향해 원색적인 불만을 쏟아내자, 수차례 뒷목을 잡는 모습을 보였다.
2월 22일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16차 변론에 이정미 소장대행과 재판관들이 입장하고 있다.
# 법조계 선후배, ‘뼈 있는 조언’
재판관들이 지쳐갈수록,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이 심판정은 창과 방패가 격돌하는 전쟁터였다. 한쪽은 대통령 탄핵을, 다른 쪽은 반대 주장을 하며 법리다툼과 함께 신경전을 벌였다. 변론 과정에선 날카로운 설전은 물론이고 고성도 오갔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된다. 심리가 시작되기 전 5~10분 동안 양측의 대리인단은 서로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전투’를 앞두고 적의를 숨긴 탐색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양측 대리인단은 사법연수원 동기, 학교 선후배, 판검사 동료 등 법조계 인맥으로 얽혀 있다.
국회 소추위원단장인 권성동 바른정당 의원은 심리 시작 전 늘 대통령 측 대리인 이중환 변호사, 또는 서성건 변호사와 악수를 나누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특히 권 의원과 서 변호사는 1960년생 동갑내기에 사법연수원동기(17기)다. 이들은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을 정치 기반으로 함께 18대 총선(2008년)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명웅 변호사(국회 측)와 이중환 변호사(대통령 대리인단 측), 전종민 변호사(국회 측)와 유영하 변호사(대통령 대리인단 측)도 근무지가 같았거나 사법연수원 동기다.
법조계 선‧후배들 간에 ‘뼈가 있는 조언’이 오가기도 했다. 탄핵심판 최종변론이 열렸던 지난 2월 27일 오후 심리 휴정 시간에 권성동 의원과 국회 소추위원 측 법률대리인 황정근 변호사가 박 대통령 대리인단 김평우 변호사와 1층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뒤늦게 대통령 대리인단에 합류한 김 변호사는 지난 2월 22일 변론기일에 탄핵심판 주심인 강일원 재판관을 향해 “국회 측 수석 대리인”이라고 비난하는 등 100분간 막말 변론을 해 재판관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를 두고 당시 법조계에선 탄핵 반대 여론을 자극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지적이 많았다.
실제로 탄핵심판이 열리는 헌재 심판정에는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심판 장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녹화돼 헌재 사이트를 통해 공개된다. 당시 김 변호사는 방청석을 향해 서서 변론하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나 강일원 주심 재판관을 비난할 때만 한 번씩 재판관 쪽을 바라봤다. 이를 두고 화장실에서 김 변호사를 만난 황 변호사가 웃으며 “선배님, 재판관들을 보면서 변론을 하셔야 카메라에 얼굴이 잘 나옵니다”라고 말했다. 황 변호사의 조언의 ‘의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후 심판정에 선 김 변호사의 시선은 대체로 재판관 쪽을 향했다. 그의 ‘막말 변론’과 표정은 생생하게 녹화됐다.
대통령 탄핵심판 변론에서 대통령 측 변호인단이 대화하고 있다.
# 방청석도 전쟁터
“제발 심판정에서 예의 좀 지켜주세요.” 헌법재판소 직원의 한숨 섞인 외침이 터졌다. 지난 2월 20일 15차 변론이 열린 날이다. 대통령 대리인단의 돌출 발언에 방청객들의 돌발 행동까지 뒤섞여 심판정은 아수라장이 됐다. 탄핵심판 초반 비교적 성숙한 자세를 유지했던 방청석의 분위기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크게 달라졌다. 증언 중인 증인을 향한 욕설이 나오는가 하면, 심판정에서 태극기를 흔들어 제지당하는 방청객의 모습도 보였다. 헌재 직원이 “처벌받을 수 있다”며 주의를 줘도 “무슨 처벌이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재판에 개입하는 방청객들이 늘면서 심판정을 지키는 헌재 직원들도 바빠졌다. 초반엔 휴대폰 사용을 제한하며 엄숙을 당부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젠 돌발 행동도 서슴지 않는 방청객들을 제지해야만 했다. 방청석 역시, 전쟁터였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지난 2월 19일 열린 14차 변론에서 박수를 치며 재판을 방해한 남성에게 퇴장을 명령했다. 탄핵심판이 시작된 후 첫 퇴장 조치다. 명령에 불응한 이 남성은 결국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갔다.
방청석의 격앙된 분위기는 헌재 밖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그동안 탄핵 찬반을 외치는 고성이 이어지다 탄핵심판 최종 변론이 열린 지난 2월 27일엔 “죽어라!” “총살 0순위!” 등 섬뜩한 말이 쉴 새 없이 오갔다. 고성과 욕설, 요란한 꽹과리 소리에 경찰 호루라기 소리까지 더해져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물러서라”는 경찰의 경고에도 탄핵 찬반을 외치는 이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삿대질을 했다. 일부 시위대는 막아서는 경찰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등 위협하기도 했다. 이날 경찰 기동대 4개 중대가 투입됐지만 소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경찰은 탄핵 심판 결정 전날인 3월 9일과 하루 뒤인 11일 서울 전 지역에 을호비상령을 내리고 헌재 주변에 20개 중대를 투입해 경력을 집중 배치했다. 또한 탄핵 심판 당일인 10일에는 갑호비상령이 내려졌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헌재 말말말] 박근혜를 십자가 진 예수에 비유 헌정 사상 두 번째 탄핵심판에서 심판을 맡은 재판관과 박 대통령 대리인단, 탄핵을 성사시켜야 할 국회 소추위원들, 출석한 증인들의 발언과 변론은 이제 역사가 됐다. 기자가 헌재 대심판정에서 직접 기록한 내용과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올라온 동영상 등을 참고해 이들의 ‘말’을 모아봤다. # “약한 사람이 누구겠나. 바로 여자 하나다” 지난 2월 22일 열린 16차 변론에서 박 대통령 측 대리인단 김평우 변호사는 각종 막말을 쏟아냈다. 김 변호사는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대해 “대통령 한 사람, 더구나 여자 대통령이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를 10분 단위로 보고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박 대통령을 ‘약한 여자 하나’라고 강조했다.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국회 측에는 “비선조직이라는 말은 깡패들이나 쓰는 말”이라며 “국정농단의 뜻이나 아냐”고 비아냥거렸다. 또 “이것(탄핵소추)은 북한에서 하는 정치 탄압이다. 국회의원들이 무슨 야쿠자들이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막말은 재판관들에게도 향했다. 김 변호사는 강일원 재판관에게 “국회의 수석 대리인이냐”고 외쳤고, 이정미 권한대행에게는 “자기 퇴임 일자에 맞춰 재판을 과속으로 진행하는 것 아니냐”고 말해 경고를 받았다. 앞서 김 변호사는 15차 변론에서 “당뇨로 어지럼증이 있어서 음식을 먹어야겠다”며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재판을 열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권한대행이 변론 종결을 선언하자 “왜 함부로 재판을 진행하느냐”며 고성을 질렀다. # “대통령 출석해도 추가기일 없다” 이 권한대행이 15차 변론에서 박 대통령 측 지연 전략에 대응해 재판 일정을 늦출 수 없다며 강조한 말이다. 이 권한대행은 “피청구인(대통령)이 출석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도 있고, 지금까지도 많았는데 (출석 여부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며 박 대통령이 뒤늦게 출석하겠다고 해도 추가 기일을 잡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최종 변론일 전 출석 여부를 밝히라는 경고였다. 헌재는 지난 2월 26일까지 박 대통령의 출석 여부를 밝히라고 통보했지만, 끝내 출석하지 않았다. 헌재는 탄핵심판 과정 내내 박 대통령 대리인단의 ‘시간끌기’와 싸워야 했다. 이들은 무더기 증인 신청을 하고 정해진 시간을 넘겨 변론을 하는 등 재판을 지연시키려 노력했다. 헌재는 결국 “탄핵심판 불출석 증인의 재소환은 없다”고 통보했다. # “대통령은 윗분이고 국민은 하찮나” 노승일 K스포츠재단 부장이 지난 2월 9일 열린 12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박 대통령 대리인 서석구 변호사에게 언성을 높였다. 서 변호사가 대통령의 탄핵을 심리하는 중대한 재판이기 때문에 같은 질문을 중복해서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하자 노 부장은 “대통령은 윗분이고 국민은 하찮나”며 맞섰다. # “지금 블랙리스트 인정하는 거죠?” 대통령 대리인단 측 송재원 변호사가 지난 1월 25일 제9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질문을 이어가자, 강일원 재판관이 “대통령 측도 블랙리스트 인정하는 거냐”고 물었다. 송 변호사는 유 전 장관에게 “특정 인사를 지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유의해서 지원 여부를 판단해라는 리스트는 가능하지 않냐”며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전제로 추궁했다. 강 재판관에 이어 질문을 받던 유 전 장관도 “저도 궁금한데 블랙리스트 인정하는 거죠?”라고 되물었다. # “최순실 비선은 맞다, 그럼 실세냐?” 지난 1월 19일 열린 7회 변론에서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에게 박 대통령 측 대리인단이 던진 질문이다. 이날 정 전 비서관은 최순실 씨에 대해 “공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는 사람”이라며 “비선실세는 어느 정권에나 있었고, 최순실이 대통령 연설문 수정한 것이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대리인단은 “최 씨가 비선실세라고 하는데, (정 전 비서관이 최 씨를 두고) ‘없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비선은 맞다. 그럼 실세인 것도 맞냐”고 물었다. 정 전 비서관은 “(최 씨는) 기본적으로 없는 사람이라 비선실세일 수 없는데도 비선실세로 활동한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며 즉답을 피했다. 대리인단이 “최 씨가 비선실세 행세를 한다는 것을 몰랐냐”고 재차 묻자 정 전 비서관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발 더 물러섰다. 결국 최 씨가 박 대통령의 비선이었음을 대리인단이 스스로 인정한 모양새가 됐다. # “기억이 안 난다” 지난 1월 16일 열린 5회 변론에서 “모른다”는 대답만 반복하던 최 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에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안 난다. 어제 일도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심판정을 채운 방청객들은 대부분 실소를 터뜨렸다. 최씨는 미르·K스포츠재단, 더블루K에 대한 추궁에 “왜 저한테 물어보느냐” “(고영태 전 더블루K이사 등의) 증언 자체가 완전 조작이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고 주장했다. # “대통령은 모함으로 사형장에 가는 소크라테스와 같다” 지난 1월 5일 열린 2회 변론에서 박 대통령 측 대리인인 서석구 변호사의 말이다. 서 변호사는 국회가 다수결로 탄핵소추를 의결한 것은 부당하다며 박 대통령을 예수와 소크라테스에 비유했다. 서 변호사는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고 예수는 십자가를 졌다. 대통령은 여론의 모함으로 사형장에 가는 소크라테스와 같다”며 “언론이 다수결의 함정을 선동하고 있다. 이런 부정확하고 부실한 자료에 의해서 (의혹이) 증폭될 때 민주주의와 다수결이 위험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 변호사의 발언에 재판관들은 웃음을 참거나 표정을 가리기 위해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이날 변론이 끝난 후 이 변호사는 서 변호사가 자신과 상의없이 의견을 개진한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해명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