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끌고 정치가 따라간 역사적 사건…누가 대통령 돼도 준엄한 민심 거스르지 못할 것
그러나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탄핵 심판 과정에서 나타난 극심한 국론 분열을 봉합하고 공백상태의 국정을 메워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기 대선, 박 전 대통령 검찰 수사 등을 놓고 자칫 매서운 ‘꽃샘추위’가 불어 닥칠 수도 있다. 탄핵 후를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대한민국 미래가 달려있다는 얘기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에 국민들이 환호하는 모습. 사진=최준필 기자
“근본적으로 나라가 안정 속에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살고 싶다. 비정상의 정상화 등 사회적 적폐를 해소하는 것, 불공정한 모습을 바로잡는 것, 이런 부분에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그 사회에서 역량을 발휘하기도 힘들고 행복하기도 어렵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14년 11월 한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말이다. 박 전 대통령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겠다. 작금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박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국민들의 분노만 자아낼 뿐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1월 같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도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꼭 만들겠다는 마음의 결심과 의지를 갖고, 앞으로도 계속 어려움이 있더라도 끊임없이 노력을 해나가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나라는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이고, 사회적 적폐는 더욱 쌓였고, 공정하지 못하고, 신뢰는 무너졌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민은 불행해졌고, 국가의 품격은 떨어졌고,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박 전 대통령 희망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온 것이다. 물론, 그 일차적인 원인은 박 대통령 본인에게 있다.
지난 2014년 이른바 ‘정윤회 문건’으로 비선 논란이 불거졌을 때 제대로 사과하고 수습했더라면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박 전 대통령 측은 문건 진위 여부보다는 유출 행위 그 자체에 프레임을 맞췄다. 결국 진실은 묻혀버렸고, ‘최순실 게이트’로 이어졌다. 한 사정당국 고위 인사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윤회 문건 때 철저히 규명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문건 유출 그 자체를 국기 문란 행위라고 한 이후 정윤회나 최순실과 같은 단어는 금기시됐다. 알면서도 문제를 삼지 못했고, 위로 보고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또 정윤회 입지가 좁아지면서 최순실의 득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국정운영을 바로 잡기 위한 ‘골든타임’을 그때 놓쳐버린 셈이다.”
지금까지의 박 전 대통령 정치 역정을 들여다보면 정윤회 문건 사태나 최순실 게이트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부분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진실 규명보다는 ‘빨대 색출’에 무게를 뒀다. 그리고 민감한 사안들은 아예 듣기를 꺼려했고, 비선 라인에 의존해 의사 결정을 했다. 지난 2007년 대선 경선과 2012년 대선 때 최태민 일가 의혹이 불거졌지만 내부에서조차 그 내용을 아는 이들이 적다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한때 박 전 대통령 최측근으로 통했던 전직 의원은 “최순실을 비롯한 몇몇 의혹들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일단 박 전 대통령 표정부터 싸늘해진다. 이 때문에 ‘팽’ 당한 친박들이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도 대통령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박 전 대통령은 변한 게 없다. 원래 그랬던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대통령이 됐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뿐만 아니라 그를 찍은 유권자들이 무언가에 홀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고 전했다.
최순실 게이트 및 탄핵 국면에서도 박 전 대통령 측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을 기밀 유출 혐의로 해임한 장면은 2014년 때의 ‘판박이’로 꼽힌다. 또 박 전 대통령은 대국민간담회를 통해 검찰 및 특검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검찰이 나를 엮었다”라는 박 전 대통령 발언은 국민들의 귀를 의심케 했다. 정당한 영장 발부에 의한 청와대 압수수색도 거부했다.
탄핵 막바지 헌재 심판조차 불복하는 듯한 박 전 대통령 측의 행태도 충격을 줬다. 박 전 대통령 대리인단들은 헌재 재판관들의 편향성과 재판 진행 불공정성을 연일 문제 삼았다. 또 일부는 장외에서 공공연히 불복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 측은 박영수 특검조차 야권에서 추천한 인사라며 수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는 불만을 터트렸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촛불’과 ‘태극기’로 대변되는 민심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 역시 일차적으로는 박 전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국민의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쯤 됐으면 아무리 억울한 부분이 있더라도 최고 국정 책임자인 대통령이 나서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의 지지층을 선동하는 행보를 보였다. 갈등을 더욱 부채질한 셈이다. 보수 인터넷 TV와의 인터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박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은 ‘국민들의 신뢰를 배반한 것’이다. 전직 대통령들은 신뢰를 잘 지켰느냐. 뭐 이런 차원이 아니다. 대통령이 일을 잘못할 수 있고, 내 맘에 안 들 수도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욕하면서도 대통령이니까.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의 경우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고, 특히 사인인 특정인에게 국정을 농단하게 한 것은 정말 용서받기 힘들다”라고 했다.
아마 박 전 대통령 측은 지난 2014년을 떠올리며 대응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국민들은 두 번 속지 않았다. 그리고 ‘촛불’을 들었다. 박 전 대통령 측이 ‘스모킹 건’ 태블릿 PC의 출처 등을 문제 삼고 나섰지만 국민들은 개의치 않았다.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촛불이 타올랐고,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지지하는 여론은 80%를 넘어섰다.
이를 지켜본 세계는 깜짝 놀랐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주주의의 발로였던 까닭에서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국민이 자기 손으로 선출한 대통령을 임기 중에도 다시 탄핵을 시킬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가장 큰 의미다. 대통령조차 국민의 외면을 받으면 임기 중에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든 것이다. 대통령 권력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국민의 힘, 민심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교수 역시 “민주주의의 획을 그었던 1987년 6·29 직선제 후 30년 되는 해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한국 민주주의가 굉장히 위태로웠지만 그래도 시민 의식이 발전이 돼 촛불 광장에 나왔고, 또 그런 것을 정치권이 받아 줘서 헌재가 탄핵을 인용하게 됐다. 게이트로 생긴 위기에 대해서 국민과 정치권이 함께 극복한 획기적인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윤태곤 실장은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리드한 게 아니라 국민들이 끌고, 정치인들은 따라갔다. 진보의 승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 중도 합리적 보수까지 모아진 거 아니냐. 폭력도 없었다. 시민의 힘이 법과 제도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도 모범적인 사례다. 헌정의 중단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간 게 아니라 어쨌든 지금 헌법 절차는 다 밟았다. 이 자체가 무너진 민주주의를 회복한 거라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지는 전계완 평론가의 말이다.
“국민의 힘이 대통령 권력 위에 있다는 것을 최초로 입증했다. 앞으로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철저한 주변 관리를 해야 하고, 또 국민의 준엄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과거에 대한 정리인 동시에 미래를 향해 엄중한 과제를 던진 것이다. 국민이 미래 권력인 차기 대통령에 대해서 똑같은 질문을 안긴 셈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국정 공백이 남긴 후유증 누가 책임지나…외교안보 ‘헛발질’ 경제 ‘뒷걸음질’ 헌법재판관 만장일치 결정으로 탄핵 심판은 일단락됐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92일간의 국정 공백은 대한민국에 큰 상처를 남겼다. 법적 책임은 차치하고서라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라는 지적이다. 우선 국내외 산적한 과제를 제때 다루지 못했다. 최순실 게이트 수사와 대통령 탄핵 심판이라는 중차대한 사안에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황교안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긴 했지만 대통령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 사드 배치 등 시급한 외교·안보 문제에 연신 헛발질을 해댔고, 갈수록 하락하는 경제지표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또 국회에서 다뤄야 할 주요 민생 관련 입법도 통과되지 못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몇몇 대기업들은 신규채용과 사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지난 1월 산업연구원이 675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경기실사지수(BSI)를 조사한 결과, 내수 전망 지수는 2013년 1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정부가 재정확대 등 경기 부양책을 쓰더라도 기업들의 투자 심리는 위축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더군다나 기업들은 대선이 실시되는 해엔 투자에 신중한 편이었다. 탄핵 심판 기간 대한민국 국격도 훼손됐다. 해외동포와 유학생들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신들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연일 보도하면서 현지인들이 한국인에게 이와 관련된 질문을 해 수치심을 느꼈다는 일화가 심심찮게 들린다. 탄핵 심판으로 인한 국론분열도 문제다. 정치권은 헌법재판소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조 아무개 씨가 박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며 투신자살을 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직장과 가정으로까지 번졌다. 서로 다른 집회에 나갔다고 부모와 자녀가 말다툼을 했다던가, 정치적 성향이 달라 양가 상견례를 미룬 사례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이 탄핵 심판에 대해 대화하다 얼굴을 붉히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헌재의 탄핵 심판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브라질에서는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탄핵당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 후에도 갈등은 계속됐고, 브라질은 극심한 혼란에 빠진 상황이다. 현재 브라질은 8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으로 역대 최장기 경기침체를 기록 중이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