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재벌 정서 확대…‘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에서 만장일치로 파면 결정을 내렸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대통령에 대한 파면 선고 직후 재계에선 ‘사회통합’을 주문하는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먼저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정치권은 협치를 통해 사회혼란이 조기에 매듭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상공회의소도 “정치적 대립과 혼란을 종식하고, 대한민국이 올바른 진로를 개척할 수 있게 뜻과 지혜를 모아 주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번 탄핵 인용 결정의 중대 근거가 된 것은 대통령의 기업 재산권 침해와 기업 경영 자유 침해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재단법인 미르와 K스포츠 설립, 최서원(최순실)의 이권 개입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판단했다.
실제 대기업들은 미르에 486억 원, K스포츠에 288억 원을 출연했지만 임직원 임면, 사업 추진, 자금 집행 등에 관여하지 못했다. 또 대통령은 최순실의 요청에 따라 현대자동차, KT 등 대기업으로부터 광고 용역 계약을 따내고 최순실의 사익 추구를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은 부패범죄 혐의로 구속됐다.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이 이러한 부패범죄에 연루됐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다고 봤다. 청와대 주도의 무리한 모금 행위가 일으킨 ‘나비효과’가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온 것이다.
미르·K스포츠재단의 ‘판도라’를 열었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헌법재판소의 인용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냈다. 전경련은 “국회와 정부는 정치적 리스크를 조속히 마무리하고, 경제살리기와 민생안정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고성준 기자
앞서 미르·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출연한 기업들은 이번 탄핵 결정문을 본 뒤 적잖은 기대감을 드러냈다. 판결 내용 가운데 대통령을 ‘가해자’로 보고 기업을 ‘피해자’로 암시한 부분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존 검찰 수사와 국회 탄핵소추안의 내용을 보면 기업은 청와대에 돈을 뜯긴 피해자”라며 “향후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대기업 수사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서도 헌법재판소 판결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반(反) 재벌 정서가 팽배한 상황에서 대통령을 잡기 위해 (피해자인) 기업을 끌고 들어간 측면이 있다”며 “탄핵 심판이 끝난 만큼 국가 혼란이 조기에 수습되고, 기업들도 자율적인 경영을 할 수 있도록 여론이 모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의 바람대로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기업들이 검찰 수사 및 정치권의 견제를 온전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대검찰청 고위 관계자는 “공소장에 적힌 기업들을 우리가 피해자로 단정지은 적은 없다”며 “당시 수사의 초점이 최순실에 있었기 때문에 시간 제약 등으로 기업 수사는 결론짓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전경. 우태윤 기자
현재 국회에는 재계가 꺼리는 ▲자사주 처분 및 의결권 제한 ▲다중 대표소송 도입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과 관련한 일명 ‘경제민주화법’이 계류돼 있다. 대통령 선거가 오는 5월로 다가온 상황에서 ‘재벌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당분간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재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재계 한 인사는 “정치권이 포퓰리즘에 휩싸일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재계와 각을 세우며 “경제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정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대변인은 “대기업 오너의 뇌물수수 혐의가 판결문에 없고, 또 다른 오너는 피해자로 간주했다”며 “재벌이 박근혜 정부와 유착해 노동개혁 등 탄압을 저질렀는데 이 같은 적폐를 시급히 청산해야 한다”고 했다. 윤영대 투기자본감시센터 대표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건 박근혜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재벌들이 뇌물을 주면 수조 원을 얻는 우리 사회의 부패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당장 한국 경제는 중국의 사드 보복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미국발 금리인상 가능성 등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상태다. 재계는 대외 흐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대기업에 대한 제재가 강해지면 경영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의 투자와 채용이 줄면 그에 따른 부정적 영향이 사회 전반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경제단체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정치권에서 경제를 살리는 방향으로 (재계와) 협업하면 좋겠다”며 “대기업 수사 등을 조속히 매듭짓고, 분열과 혼란이 없게 해야 한다”며 “경제계 전체를 복지부동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