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정계의 실력자인 야마사키 타쿠 자민당 간사장(작은 사진)과 10년 동안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던 호스티스 출신의 야마다 카나코. | ||
이미 지난해 4월 이 여성은 <주간문춘>에 수기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야마사키 의원은 고이즈미 정권을 지탱하는 자민당 ‘넘버 2’의 핵심권력이었던 만큼 이 놀라운 ‘하반신 스캔들’에 정계는 들썩거렸다.
그리고 1년의 세월이 흐른 올해 4월, 이 여성은 이번에는 ‘야마다 카나코’라는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야마사키 의원과의 첫만남부터 헤어짐을 자세하게 써내려 간 고백체의 수기 <선생님>(아스카신샤 발행)이 발간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저는 야마사키 타쿠 자민당 간사장의 정부올시다.’
‘선생님 죄송해요. 그리고 이젠 안녕.’
심상치 않은 띠지가 붙어 있는 고백수기 <선생님>이 발간된 것은 지난 4월17일. 세인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면서 대중 앞에 한 정치인의 ‘하반신 인격’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자민당 간사장인 야마사키 타쿠 의원의 정부였던 이 책의 저자 ‘야마다 카나코’씨가 야마사키 의원을 처음 만났던 것은 1992년 여름의 일이었다. 야마다씨는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후쿠오카시 나카스에 있는 고급클럽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날 클럽에서는 현지 건설업협회가 주최하는 성대한 재계 모임이 열렸고, 이때 야마다씨는 VIP실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야마사키 의원과 만나게 된다.
“그때 오신 분들 중 한 분이(당시 미야자와 내각의 건설부장관을 지내고 있던 야마사키 타쿠) 오셨습니다. (중략) 회합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은 저에게 다가와 주위에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전화번호를 알려 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선생님> 본문 중에서)
약 반 년 후, 야마다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 도쿄에 한번 놀러오지 않겠나?”
전화를 건 사람은 야마사키 의원이었다. 장소는 야마사키 의원이 생활하는 중의원구단숙사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호텔 에드몬트’였다. 92년 10월5일,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은밀한 생활’은 이후 10년 동안 지속됐다.
▲ 문제의 고백수기 <선생님> 책표지. | ||
“야마사키 선생님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학창시절 유도부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부원 전원이 모여 ‘누구 물건이 가장 큰가’ 대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 대회에서 선생님은 ‘크기’ ‘길이’ ‘단단함’, ‘지속력’ 등 모든 부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야마사키 의원은 이런 무용담과 더불어 “내가 의원이 안됐더라면 AV(성인비디오) 배우가 됐을 것”이라거나 “낙선하면 여대 교수가 되고 싶어. 그곳은 젊은 보석들로 가득하니까”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다. 야마사키 의원은 도쿄와 후쿠오카에서 관계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 나갈 때도 셀 수 없이 야마다씨를 동행했다. 해외에 나갈 때 야마다씨는 반드시 세 가지 세트를 준비해야 했다. 정력제, 윤활제, 그리고 새 속옷이 바로 그것.
야마사키 의원은 섹스를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 빨대를 꽂아 “쭉쭉” 소리를 내면서 정력제를 마셨다고 한다. 해외에 야마다씨를 데리고 나가는 일뿐만 아니라 현지에 도착해서 야마사키 의원이 열을 쏟아부은 것은 외교나 정치관련이 아니라 ‘현지의 전통의상 사모으기’였다. 그렇게 구입한 전통의상을 야마다씨에게 입히고 이른바 ‘코스프레 섹스’를 즐겼던 것. 야마사키 의원은 그런 각국의 전통의상이나 특이한 복장을 야마다씨에게 입혀놓고 하나씩 벗기는 것을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때로는 야마다씨에게 팬티만 벗게 한 채, 야마사키 의원 자신만 홀딱 벗고 흥분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처음 야마다씨가 야마사키 의원과 동행해 해외에 나간 것은 1993년 4월의 미국 워싱턴행. 당시 야마사키 의원이 선택한 복장은 군인풍의 복장과 여고생 복장이었다.
“감색 블레이저와 체크무늬 미니스커트 스타일은 선생님이 주문하신 것이었지만, 저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군인복장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우노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던 분답게 제가 군복입은 모습을 보고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1994년 대만 방문에서는 현지 백화점에서 옆선이 깊게 패인 진분홍색 차이나드레스를 구입했다. “야마사키 선생님은 빨간색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빨간색 속옷을 입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흥분했었고, 선생님 자신도 빨간색 넥타이를 즐겨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날의 기쁨 또한 각별해 보였어요. 저에게 차이나드레스를 입게 한 채 격렬하게 섹스를 했습니다.”
▲ 야마사키가 ‘코스프레 섹스’를 위해 사준 중국풍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야마다. | ||
이런 야마다씨의 ‘수당’은 1회 밀회에 10만엔(약 1백만원). “싱가포르와 브루나이 방문시 중의원에게는 일당 등을 포함해 72만5천5백80엔(약 7백20만원)이 지급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제가 50만엔(약 5백만원)을 받았는데, 제가 받았던 돈은 거기에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야마다씨는 10년이 넘는 야마사키 의원과의 관계 속에 두 번이나 아이를 낙태시켜야 했다. 임신 사실을 야마사키 의원에게 알리면 중절수술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야마사키 의원은 “여자는 낙태하면 할수록 섹스가 좋아지는 법”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펴면서 언제나 야마다씨의 몸을 요구해 왔다고 한다. 두 번째 임신을 했을 때는 “몇 시간이고 이렇게 몸을 부딪히고 있으면 아이 같은 것은 떨어질 것이다. 나의 강렬한 섹스로 아이가 떨어지게 해주지!”라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야마다씨를 더욱 경악하게 만든 것은 야마사키 의원이 여자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그 여인과 섹스를 하고 싶다고 한 일이었다. 사진 속 여성은 다름아닌 야마다씨의 어머니였다. 경악한 야마다씨에게 야마사키 의원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고.
“나는 자매나 친척 관계인 여성 세 명과 섹스를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모녀지간과 섹스를 나눈 적은 없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모녀와 세 명이 함께 섹스를 해보고 싶다.”
이런 그에게 너무 질려버린 나머지 야마다씨는 2년 전 야마사키 의원에게 이별을 고했다. “마지막 밀회는 2001년 11월25일, 언제나 가는 에드몬트 호텔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먼저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하면 들어주지 않고 제 몸을 요구해 왔는데 이날은 무뚝뚝한 얼굴로 저의 이야기를 듣더니 ‘퇴직금’ 5백만엔을 내밀 뿐이었습니다. 제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지만, 선생님을 미워해서는 아니었습니다. 10년은 긴 시간이었고,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지금까지 선생님으로부터 단 한 차례도 전화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이름과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면서까지 이런 고백을 한 이유에 대해 야마다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10년 동안 야마사키 선생님의 ‘성의 노예’로 지냈습니다. 두 번의 낙태와, 또다른 정부가 있다는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저는 완전하게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때 잠시나마 선생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는 것은 야마사키 선생님과, 또 정부였던 내 자신과도 완전히 결별하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야마다씨는 마지막으로 야마사키 의원에게 마지막으로 보내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야마사키 선생님은 자주 저에게 ‘나는 총리대신이 될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지금도 그럴 작정이시라면, 자신의 하반신 정도는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야마사키 의원은 지난해 <주간문춘>에 가명으로 실렸던 야마다씨의 수기 내용을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더 쇼킹한 고백서가 출간된 지금, 과연 그가 어떻게 반론을 펴나갈 것인지 일본국민들이 주목하고 있다.
나운영 해외정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