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꾸역→장롤코→장꾸준…장원준은 진화중
사실 별명은 스타 선수들만 가질 수 있는 무형의 재산 가운데 하나다. 인터넷 야구 커뮤니티와 댓글 문화가 활성화된 후로는 인기가 있거나 주목을 많이 받는 선수들은 대부분 기발한 별명을 하나둘씩 갖고 있다. 팬들과 언론의 관심을 그만큼 많이 받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그 안에는 더러 선수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별명들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말이 있듯, 좋은 별명과 나쁜 별명 모두 그 선수를 향한 관심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다.
‘니느님’ 더스틴 니퍼트. 사진출처=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두산 외국인 투수 더스틴 니퍼트의 별명은 ‘니느님’이다. 니퍼트와 ‘하느님’을 결합한 단어다. 2011년 한국에 온 니퍼트는 지난해까지 6년간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군림해왔다. 특히 지난해에는 22승을 올려 역대 외국인 투수 한 시즌 최다승 기록에 타이를 이뤘다. 2015년과 2016년 한국시리즈에서 눈부신 피칭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팀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두산팬들이 “외국인 선수 첫 영구결번을 주자”는 제안을 벌써부터 할 정도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니퍼트에 관련된 기사에는 ‘니퍼트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마음이 경건해졌다’는 의미로 ‘니멘’이라는 댓글이 등장할 정도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마이클 보우덴이라는 최상의 파트너를 만났다. 니퍼트가 22승, 보우덴이 18승을 해내면서 무려 40승을 합작했다. 이 때문에 ‘니느님이 보우덴하사 우리 두산 만세’라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애국가 가사인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응용한 것이다. 니퍼트와 보우덴은 이미 너무 유명해진 ‘판타스틱 4’의 일원이기도 하다. 두 외국인 투수와 함께 국내 선발 투수인 장원준과 유희관까지 모두 15승을 해내면서 네 투수가 동시에 멋진 별명을 갖게 됐다. 슈퍼 히어로 무비인 ‘판타스틱 4’의 주인공들처럼 적수가 없는 위력을 발휘했다는 의미다.
‘판타스틱 4’의 일원인 장원준은 별명이 진화를 거듭한 케이스다. 롯데 시절에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장꾸역’이나 ‘장롤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장꾸역’은 말 그대로 이닝을 ‘꾸역꾸역’ 채운다는 의미. 식욕이 없는 날 음식을 입에 한 가득 넣고 어떻게든 넘겨보려 애쓰듯이, 불안한 피칭을 하면서도 끝내 이닝은 많이 소화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장롤코’는 좋을 때와 나쁠 때의 등판 결과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의미를 롤러코스터에 빗댄 별명이다. 그러나 두산으로 이적한 후에는 훨씬 더 기분 좋은 별명이 붙었다. ‘장꾸역’이 아닌 ‘장꾸준’이다. 매년 안정적으로 10승 이상을 해내고,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는 일도 없이 꾸준하게 활약한다는 의미에서다. 선발 투수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별명 가운데 하나다. 장원준은 올해 왼손 투수 최초로 8년 연속 10승에 도전한다.
# ‘국민’이란 글자가 주는 무게감
김인식 전 한화 감독은 ‘국민 감독’이라는 별명과 동일시된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신화와 2009년 WBC 준우승 신화를 모두 이끈 감독이라서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이 최초로 메이저리거들과 같은 그라운드에서 뛰었던 WBC는 감독은 물론 선수들에게도 ‘국민’이라는 칭호를 선사한 계기가 됐다. kt 이진영은 여전히 ‘국민 우익수’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으로 유명하다. 2006년 WBC에서 그림 같은 다이빙 캐치로 대량 실점 위기를 넘기고, 총알 같은 홈 송구로 동점이 될 점수를 막아낸 덕분이다. 당시 일본 대표팀 오 사다하루 감독이 “한국의 우익수 때문에 두 번 졌다”고 말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은 은퇴한 박진만 SK 코치 역시 같은 대회에서 물샐 틈 없는 수비를 뽐내면서 ‘국민 유격수’로 공인 받았다. 이진영과 박 코치는 아직까지 그 어떤 우익수와 유격수에게도 그 별명을 물려주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활약이었다. 그때의 영향력을 뛰어 넘을 만한 수비가 국제대회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라이언킹’에서 ‘국민타자’가 된 이승엽.
물론 가장 유명한 ‘국민’ 선수는 역시 ‘국민 타자’ 이승엽이다. 이승엽은 원래 ‘라이언킹’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이승엽의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에서 ‘킹’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승엽의 활약은 단순히 소속팀과 KBO 리그에 국한되지 않았다. 국제대회에서 숱한 ‘8회의 기적’을 선사하면서 역대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 8년이나 일본에서 뛰었는데도 한국 프로야구의 홈런 관련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이승엽이 2003년 기록한 한 시즌 최다 홈런(56개) 기록은 13년이 흐른 지금도 아직 깨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삼성의 ‘라이언킹’에서 한국의 ‘국민 타자’로 격상됐다. 이승엽의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리그 전체가 준비 태세에 돌입한 이유다.
올해 롯데로 복귀한 이대호도 지난해 자랑스러운 별명 하나를 얻었다. 이대호는 앞서 한국에서 뛸 때 유난히 큰 체격 덕분에 ‘빅 보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도 큰 덩치로 조명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대호 역시 한국을 넘어 국제대회에서 활약하면서 ‘조선의 4번 타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됐다. 이승엽마저 떠난 한국 국가 대표팀에서 4번 자리를 훌륭하게 소화한 덕분이다.
# 별명의 제왕은 따로 있다?
물론 별명의 진정한 제왕은 역시 한화 김태균이다. 최근에는 좀 잠잠해졌지만, 한때 김태균이 안타만 쳐도 ‘김안타’, 달리다 넘어지기만 해도 ‘김꽈당’이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야구팬들은 TV 중계 화면에 비치는 김태균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수십, 수백 개의 별명을 양산해냈다. ‘김거북’, ‘김만세’, ‘김멀뚱’, ‘김질주’ 등도 그 안에 포함된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아예 ‘김별명’이라는 별명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김태균과 이름이 한 획만 다른 NC 김태군은 어부지리로 ‘김별멍’이라는 유사 별명을 얻었다.
‘오지배’ 오지환. 사진출처=LG 트윈스 페이스북
LG 박용택은 흔하지 않은 이름 끝 글자 덕분에 각종 ‘택 시리즈’를 보유하고 있다. 타선이 활화산처럼 터질 때는 ‘용암택’, 사직구장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일 때는 ‘사직택’으로 통하지만, 득점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때는 ‘찬물택’이라는 냉정한 별명도 따라 붙는다. SK 최정은 남다른 힘과 소년 같은 얼굴의 부조화 때문에 ‘소년장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몸에 맞는 볼이 유독 많아 통산 최다 사구 기록을 돌파하면서부터는 ‘마그넷 정’이라는 새 별명을 얻었다. 몸이 자석처럼 공을 끌어당겨서 많이 맞는다는 의미다. LG 오지환은 타점만큼 삼진도 많고, 호수비만큼 실책도 많은 양극단의 스타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결국 경기를 지배한다는 뜻에서 ‘오지배’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지난해 포스트시즌에서도 ‘오지배’의 면모를 어김없이 펼쳐 보였다.
그런가하면 올해 KIA로 이적한 최형우는 ‘금강불괴’라는 별명이 있다. 아주 단단해서 절대 깨지지 않는 금강불괴처럼 매년 어김없이 견고하게 풀타임을 소화한다는 의미다. 경기 도중 큰 부상이 염려되는 상황에 부딪히고도 장기 이탈 없이 경기에 꾸준히 출장하는 최형우의 장점 덕분에 이런 별명이 나왔다. KIA 나지완은 팬들이 ‘나비’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성이 나 씨인 데다 KIA 2군 구장이 있는 함평이 나비 축제로 유명하다는 이유에서다. 2군에 다녀온 나지완이 180도 다른 모습으로 펄펄 나는 모습에 “나비의 기운을 받고 왔다”는 해석이 나온 게 시작이었다. 실제로 나지완은 자신의 야구 장비에 나비를 새기면서 별명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그냥 이름이 특정 단어와 비슷해서 생긴 별명도 꽤 있다. 넥센 포수 박동원은 ‘참치’로 통한다. 그의 이름과 같은 브랜드에서 생산하는 참치캔이 국민적으로 유명해서다. 넥센 이택근의 별명은 ‘택근 브이’다. ‘태권 브이’의 ‘태권’과 ‘택근’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kt 유한준은 ‘무한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름은 ‘유한’하지만, 실력은 ‘무한’하다는 뜻에서 나온 좋은 애칭이다. SK 박재상은 가수 싸이의 본명과 이름이 같아 그냥 ‘싸이’로 불린다. 가을에 열리는 포스트시즌에 많은 활약을 했던 SK 조동화는 유명한 드라마의 이름을 차용한 ‘가을동화’라는 별명이 생겼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끝판대장’ 오승환, 미국서도 ‘파이널보스’ 선수들을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르는 문화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선수들에게 특색 있는 별명을 즐겨 붙인다. 한국인 메이저리거들도 예외는 없었다. 텍사스 추신수의 별명은 ‘추추 트레인’이다. 추(Choo)라는 성이 미국에서는 기차 경적 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라서다. 정확성, 장타력, 수비력에 강한 어깨와 빠른 발까지 갖춘 추신수가 경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차 같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세인트루이스 오승환은 한국 마운드에서 보여줬던 위력뿐만 아니라 ‘끝판대장’이라는 별명까지 그대로 메이저리그에 수출했다. 같은 의미를 지닌 ‘파이널 보스(Final Boss)’라는 별명을 현지 언론도 자주 쓰고 있다.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부터 마무리 투수 자리를 꿰찬 덕분이다. ‘파이널보스’ 오승환(왼쪽)과 ‘추추트레인’ 추신수. LA 다저스 류현진은 한국에서 ‘괴물’이라는 별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투수였다. 이 때문에 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한국에선 ‘코리안 몬스터’라는 별명을 가장 많이 썼다.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뿌렸던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듯, 류현진도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산 괴물’의 모습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몬스터’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잘 쓰이지 않았다. 대신 팀에서 만들어낸 재미있는 별명들이 하나둘씩 생겼다. 대표적인 게 ‘베이브 류스’다.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내셔널리그 특성상 류현진이 타자로 나설 기회가 많았는데, 데뷔 첫 해 애리조나전에서 3타수 3안타를 때려내는 모습을 보고 현지 중계진과 다저스 구단 SNS가 그렇게 부른 것이다. 전설적인 타자 ‘베이브 루스’와 류현진의 성인 ‘류’를 합친 별명이었다. 또 류현진이 데뷔 5경기에서 모두 승승장구를 이어가자 류현진의 ‘진’과 ‘광기’는 의미의 ‘인새너티(Insanity)’를 합성해 ‘진새너티’라 칭하기도 했다. 피츠버그 강정호는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인 2015년부터 ‘킹 캉(King Kang)’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강정호의 성인 ‘캉(Kang)’에서 파생된 별명. 유명한 영화 캐릭터인 ‘킹콩’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피츠버그 동료들은 강정호가 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에 들어오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내리면서 킹콩을 흉내 내는 세리머니를 하곤 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한국에서 벌어진 음주 뺑소니 사고로 인해 올 시즌에는 ‘킹 캉’의 명성에 빛이 바랬다. 미네소타 박병호는 팀 내에서 ‘빅뱅(Big Bang)’과 발음이 비슷한 ‘박뱅(Park Bang)’으로 불리고 있다. 빅뱅은 우주 대폭발을 뜻하는 단어. 박병호의 엄청난 파워를 입증하는 별명이다. 박병호는 지난해 성적이 썩 좋지 않았지만, 시즌 초반 초대형 홈런을 펑펑 날리면서 현지 팬들과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네소타는 올해 ‘박뱅’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