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리 `욕쟁이 할머니집`의 대표이자 홍승표 화백의 모친인 정의만 씨.
[서울=일요신문]주성남 기자=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의 ‘정의만(92)’씨. 그는 맛집으로 잘 알려진 `욕쟁이 할머니집`의 대표이자 서예와 회화 부문에서 맹활약 중인 홍승표 화백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정의만 씨는 2009년 장염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이에 급하게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을 잃은 채 중환자실에서 3개월을 보냈다. 다행히 회복은 됐으나 고령에 정정하던 전과는 달리 주변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다시 3개월을 일반 병실에서 지낸 뒤 퇴원한 정씨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보내야만 했다. 찰진 욕으로 호령하던 당당한 모습은 사라졌고 1997년부터 온갖 정성을 쏟았던 음식점도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직원에게 맡겨야 했다.
막내아들인 홍승표 화백이 항상 정씨의 곁을 지키며 대소변을 받아냈다. 2015년 9월 홍 화백은 어머니의 손에 힘이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안타까운 마음에 색칠공부를 권유했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던 정씨도 점차 재미와 흥미를 느꼈다. 그 옆에서 홍 화백은 자신의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지난해 12월경 홍 화백은 정씨의 침대 옆 벽지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뜻 보기에는 낙서 같았지만 예술가의 눈에는 평범치 않았다.
홍 화백은 “어머니는 자식을 힘들게 키우느라 평생 그림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분인데 벽지에 그린 그림을 처음 본 순간 표현 등이 예사롭지 않았다”면서 “내 몸에 흐르는 예술가의 피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홍 화백은 어머니에게 종이와 연필, 색연필 등을 드렸고 정씨는 침대에 누워서 또는 책상에 앉아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사람만 그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살아온 이야기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가평 화악산과 동두천 소요산 자락의 천막생활 시절, 포천에 정착해 유원지 등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던 때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또 5명의 자녀를 키우며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순간들도 기억해 냈다.
힐링스 가족/ 2017. 2.12./ 욕쟁이 할머니.
정씨의 그림은 언뜻보면 추상화 같지만 무엇을 표현했는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으며 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홍 화백이 어머니의 그림을 동료화가들에게 보여주자 무척 놀랐다고 한다. 아들의 작품 활동을 옆에서 늘 지켜봐서 그런지 소와 말 등 동물 그림을 해학적으로 잘 표현했다.
정씨는 한동안 아이들에게 젖 먹이는 자신, 천막 속 가족, 아들과 뽀뽀하는 모습 등을 그리더니 최근에는 자신을 찾는 병원장과 병원 직원 등 지인들을 도화지에 담고 있다. 그가 3개월가량 그린 그림은 무려 100점이 넘는다.
이에 홍 화백은 어머니의 그림을 대부분 그대로 전시하기로 했다. ‘욕쟁이 할머니 그림이야기’라는 제목의 전시회는 오는 20일부터 다음 달 19일까지 포천시 소흘읍에 위치한 모산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홍 화백은 제29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그동안 미술대전에서 7회 입선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예, 산수화, 민화 등은 물론 한자 등 언어와 이미지를 한 화면에 담아내는 독특한 기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5년에는 미국에서 고 박수근 화백의 작품과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최근에는 어머니가 오랫동안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자 ‘수(壽)`를 활용해 효를 표현한 작품들을 그리고 있다. 홍 화백은 “어머니의 그림에는 모자상이 많은데 아들에 대한 사랑, 수호자 같은 모습이 많이 담겼다”며 “전시회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사는 너무 무서워요/ 2017. 2.14/ 욕쟁이 할머니.
한편 정씨와 홍 화백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들은 영화제작사는 정씨의 새로운 도전과 삶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고 있다.
영화제작사인 ‘히트 앤 이엔티’ 김윤수 대표는 “2016년 말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홍 화백을 통해 정씨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할머님의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에 감동해 영화로 만들어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울예술대학교 졸업생들과 문화예술인 등 250여명이 주축이 되어 만든 재능기부단체 ‘문화예술나눔공동체 보짱’의 단장을 맡고 있는 김 대표는 자신의 제작사가 아닌 ‘보짱’을 통해 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다. 김 대표는 회원들에게 정씨의 이야기를 전하고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영화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지 않고 무료 배포하자는 김 대표의 뜻있는 제안에 많은 예술인들이 함께 했다.
연출을 맡은 박정근 감독과 서기원 촬영감독은 약 한 달간 정씨의 집에 머물며 그의 일상을 듣고 보고 관찰하며 무엇을 영상에 담고 세상에 이야기할지를 준비했다. 또 영화의 테마음악은 뮤지컬 작곡가로 유명한 차경찬 음악감독이 맡아 기존 음악과는 다르게 정씨의 이야기를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박정근 감독은 “처음엔 92세 할머니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삶과 정리를 이야기하는데 영화의 초점을 맞추려 했지만 할머님의 생활을 통해 전혀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면서 “삶의 욕망과 애착이 그 누구보다도 강함을 느껴 영화의 구성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수정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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