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기업 전·현직 임원들 불똥 가능성에 전전긍긍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사건 관련자 처벌로 비교적 사실 관계가 명확해진 ‘입시 비리’와 달리 재산 국외 도피 과정은 아직 ‘의혹’으로 남아 있다. 또 삼성의 승마 지원 배경을 정 씨가 어떻게 진술하느냐에 따라 ‘삼성 재판’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승마 지원 등 명목으로 최 씨에게 433억 원의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삼성은 정 씨 귀국 이후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도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 씨가 법정에서 유의미한 증언을 내놓지 않는 이상 그 파장을 예단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삼성 관계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증인신문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 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 씨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 새롭게 규명돼야 할 부분은 최순실 일가의 은닉 재산 의혹이다. 앞서 특검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최순실의 국내 재산을 200억~300억 원대로 추산했다. 그러나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순실의 은닉재산이 200억 원의 100배 정도는 될 수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정 씨가 해외 도피 기간 사용한 자금의 출처를 추적하면 최순실 일가의 또 다른 은닉재산 고리가 드러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치권과 사정당국은 최순실 일가의 은닉재산을 규명할 핵심 ‘키맨’으로 양해경 전 삼성전자 사장을 꼽는다. 1970년 삼성에 입사한 양 전 사장은 제일모직 독일 함부르크 주재원을 거쳐 1995년 삼성전자 독일지주회사 대표를 역임했다. 또 2004~2011년 삼성전자 유럽본부장(사장)을 맡으면서 유럽한국경제인협회장을 겸임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비선실세 최순실 관련 뇌물공여 등 20회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삼성 내 유럽 전문가로 꼽히는 양 전 사장은 2014년 10월부터 한독경제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독일 한인사회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작성한 메모에도 양 전 사장의 이름이 나온다. 독일계 법인의 한국 지사장을 맡고 있는 한 임원은 “최순실 일가가 거점으로 사용한 독일은 한인사회가 넓지 않아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교류할 수 있다”고 했다.
양 전 사장이 소속된 한독경제인회와 고려대 독일교우회는 최순실 국정농단을 도운 외곽조직으로 평가받는다. 최순실이 임명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유재경 전 미얀마 대사, 김인식 전 코이카(KOICA) 이사장과 특혜 대출에 관여한 의혹을 받았던 이상화 전 KEB하나은행 독일 법인장 등이 모두 한독경제인회 또는 독일교우회 출신이다. 앞서 특검은 ‘양 전 사장이 최순실과 삼성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지만 수사 기간이 연장되지 않으면서 의혹을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 관계자는 “양 전 사장은 이미 퇴임한 임원으로 제기된 의혹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고 전했다.
사정당국 일각에선 양 전 사장이 입사 직후 거의 유럽에 머물렀던 점을 고려해 최순실 등 유럽에 연고가 있는 인사의 해외재산을 세탁해 온 것 아니냐는 주장을 내놓는다. 공교롭게도 양 전 사장과 대구고, 고려대 선후배 사이인 김인 삼성SDS 고문은 최근 삼성 오너의 차명재산을 관리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삼성 특검 과정에서 김용철 변호사는 그룹 임원들 명의로 삼성이 차명재산을 형성해 온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사정기관 관계자는 “양 전 사장과 관련한 여러 의혹이 제기됐지만 정식 수사로 전환되지 않은 점은 석연치 않다”고 했다.
‘국정농단 사건’의 중심 최순실 씨가 5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정 씨 귀국에 촉각을 곤두세운 또 다른 기업은 한화다. 한화그룹의 대관 업무를 총괄해 온 금춘수 한화그룹 부회장은 양 전 사장과 함께 한독경제인회 출신이다. 또 재판 중인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과 막역한 사이다. 삼성물산 합병을 앞두고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는 금 부회장으로부터 ‘합병에 부정적인 보고서를 쓰지 말라’는 압력을 받은 것으로도 전해진다. 한화 관계자는 “금 부회장은 최순실 사건과 어떤 연관이 없으며, 실체도 없는 한독경제인회에서 활동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화가 삼성보다 먼저 정 씨의 존재를 알았고, 2015년 초까지 회장사 자격으로 승마협회 내부 문제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는 점은 또 다른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삼남인 김동선 전 한화건설 팀장은 정 씨와 함께 국가대표 승마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한화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승마 훈련 당시 정 씨가 김 전 팀장에게 ‘우리 아빠(정윤회)가 너네 아버지를 도와줄 수 있으니 나한테 잘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자 김 전 팀장이 화를 내면서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안다. 정 씨와 김 전 팀장의 사이는 무척 좋지 않았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또 다른 비선 실세로 꼽히는 정윤회 씨의 국정농단 의혹은 문건 유출 경로만 수사된 채 그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한화는 ‘문건 유출’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최순실의 측근으로 꼽히는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은 정 씨를 럭비공에 빗대 “여과 없이 말하는 스타일”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만약 정 씨가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사건을 공개한다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 파장은 재계와 금융권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