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갑자기 들이닥친 해일에 폐허가 된 일본 아오나에 마을 모습. 이 때의 해일은 우리나라 동해안까지 덮쳐 큰 피해를 줬다. | ||
지금까지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쓰나미로 피해를 입었던 것은 모두 네 차례 정도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규모는 지난 1983년 5월26일 발생했던 ‘아키다 지진해일’이었다. 일본 혼슈섬 북동쪽에 위치한 아키타현 근해에서 발생했던 이 지진은 유라시아 대륙판과 북아메리카판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7.7의 강진이었다. 이 여파로 최대 14m의 파도가 일본 해안을 덮쳤으며, 사망자는 1백 명을 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진 발생 약 70분 후 울릉도에서 처음 5m 높이의 쓰나미가 해안을 덮쳤으며, 약 두 시간 후에는 동해안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 당시 10분 주기로 몰려왔던 쓰나미로 동해안의 수면이 최고 3m까지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현상이 반복됐으며, ‘쾅’하는 폭음과 함께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수심 5m의 항구 바닥이 그대로 드러났다가 10분 후 다시 밀려오는 기현상이 일정 시간 계속됐다.
피해 규모 역시 적지 않았다. 동해시에서 한 명이 사망했는가 하면 어부 두 명이 실종됐으며,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임원항에서는 두 명이 부상을 입고 20채의 가옥이 모두 파괴되기도 했다.
이때 발생한 해일로 부산, 울산, 묵호, 속초, 울릉도의 해수면이 상승하고 재산 피해 규모는 모두 4억여원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다 가까운 시기로는 지난 1993년 7월12일 일본 홋카이도 오쿠시리 섬 북서해안의 지진으로 발생했던 쓰나미가 있다. 당시 리히터 규모 7.8에 달했던 이 지진이 일으킨 해일은 2차세계대전 후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해일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지진 발생 2~5분 뒤 평균 10~20m 높이의 해일이 여러 차례 오쿠시리 섬 해안과 홋카이도 주요 해안을 덮쳐 순식간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30분 후 러시아 남동쪽의 프리모리에 해안을 덮친 해일은 약 90분 후 울릉도에 1m가량의 해일을, 그리고 다시 20분 후에는 속초, 동해, 포항에 최대 2~3m의 해일을 일으켰다. 수십 척의 어선이 침몰되거나 시설물이 파괴되는 등 약 4억여원의 재산 피해를 냈지만 10년 전의 아키다 지진해일과 달리 미리 발표된 대피령 덕분에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다.
일본 역시 수차례 실시했던 대피 훈련을 통해 그나마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진이 한밤중에 갑자기 발생했던 만큼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쿠시리 섬의 작은 마을인 모나이 해변에서는 최대 30.6m의 해일로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됐으며, 산중턱의 나무들이 모조리 쓰러지고 지름 1m의 큰 바위들의 위치가 변경되는 등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오쿠시리 섬 끝자락에 위치한 아오나에 마을 역시 5~10m의 해일로 마을 중심부까지 물에 잠겼으며, 3백40여 가구가 모두 파괴되기도 했다.
당시 목숨을 잃었던 오쿠시리 섬 주민의 수는 대략 2백 명가량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밖에 1940년 8월2일 일본 서쪽 해안에서 발생한 규모 7.5의 지진으로 동해안의 나진항과 묵호항에서 0.5~2.0m가량의 해일이 기록되었으며, 경북 울진과 울릉도에서 각각 2m의 해일이 목격되어 가슴을 쓸어 내린 바 있다.
가장 오래된 한반도의 쓰나미로는 1741년 8월29일 일본 홋카이도 남서쪽 해안에서 발생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오시마-오시마 쓰나미’가 있다. 당시 7.5의 강도 높은 지진으로 일본에서만 1천5백 명이 사망했으며, 강원도 역시 집들이 잠기고 배들이 난파되는 등 그 피해가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