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경기 결승전처럼 임해…멋진 경험했다”
신태용 감독은 U-20 축구대표팀의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일요신문] “백수가 됐는데 별로 걱정이 안 되는 유일한 감독인 것 같아요.”
“저 아직 백수 아니에요. 6월 11일까진 20세 이하 대표팀 감독입니다(웃음).”
여전했다. 그 입담은. 신태용 감독이 이끌었던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은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코리아 2017’ 포르투갈과의 16강전에서 1-3으로 패하는 바람에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신나고 재미있는 축구’를 내세우며 거침없이 내달렸던 ‘신태용호’는 포르투갈 전을 끝으로 질주를 멈췄다. ‘바르사 듀오’ 이승우-백승호를 앞세운 신태용의 자율 축구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신 감독은 결과에 대한 비난과 비판 속에 몸을 던져야 했다. 그 아픔을 올곧이 곱씹으며 잠시 휴식 중인 신 감독을 만나봤다.
―지금까지 지도자 생활하면 이렇게 휴식을 취했던 적이 몇 번 있었나.
“한 번밖에 없었다. 성남 일화 감독에서 물러난 후 1년 8개월가량 쉬었다. 내 스승이셨던 크라머 감독님이(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대표팀 감독) 축구 지도자는 1년 이상 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본의 아니게 1년을 넘게 쉬었다. 처음 6개월은 괜찮았다.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도 만나고, 유렵 연수도 다녀오면서 즐겁게 보냈는데 6개월이 지나니까 살짝 불안해지더라. 그래도 호주와 용인에 축구교실을 내고 해설도 하는 등 개인적인 일에 충실했던 시간들이었다.”
―오늘(6월 8일) 새벽 축구대표팀이 이라크와 평가전에서 0-0 무승부를 이뤘다. 유효슈팅이 0개로 시종 답답한 모습을 보였는데 혹시 축구 경기를 챙겨봤나.
“술 먹고 새벽에 들어가서 TV를 켜 놓은 채 자다 깨다를 반복하느라 집중해서 보진 못했다. 평가전 결과가 아쉽긴 했지만 실제 경기인 카타르전에선 좋은 모습을 보여줄 거라 기대한다.”
―그동안 지도자 생활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구원투수’로만 등판했다. 성남일화 감독도 감독대행으로 첫 발을 내딛었고, A매치 대표팀도 감독대행으로 데뷔했다. 이광종 감독의 투병으로 올림픽대표팀 지휘봉을 물려받았고, 2016년 말엔 안익수 전 감독이 이끌던 20세 이하를 맡았다.
“A대표팀 감독대행에서 수석코치로, 23세 이하에서 20세 이하 대표팀 감독으로 점점 내려왔다. 남들은 위로 올라가는데 난 자꾸 내려왔다(웃음). 그런데 난 행복했다. 축구인들이 날 인정했기 때문에 ‘소방수’로 가장 위급할 때 투입됐던 게 아닌가. 그건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축구협회 김호곤 부회장, 안기현 전무, 이용수 기술위원장 등은 축구에서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생각 없이 신태용을 투입했겠나. 신태용을 보내면 어느 정도는 해줄 거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축구인들한테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행복했고 고마웠다.”
―중간에 팀을 맡게 되면 분명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당연하다. 하지만 밥만 먹고 축구만 했던 선수들이라 내가 크게 뜯어고치지 않고 기본 형태를 유지하면서 선수들의 장점을 살려주는 방법으로 팀을 이끌었다. 어쩌면 나도, 선수들도 적응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난 진짜 복 받은 놈이다. 짧은 시간 동안 한 번 경험하기도 어려운 국제대회를 여러 차례 치렀다. 더욱이 23세 이하, 20세 이하 대표팀을 이끌며 선수들과 동고동락했던 부분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 남을 것이다.”
―이젠 ‘구원투수’보다는 ‘선발투수’로 나서고 싶지 않나.
“내가 뭘 하고 싶다고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을 당하는 입장에선 어떤 자리가 주어지든 최선을 다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프로팀을 이끌 때와 대표팀 감독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동전의 양면이었다고 본다. 프로는 팀에 내 색깔을 완전히 입힐 수 있다. 문제점이 발견되면 보완해서 일주일 있다 시합하고, 또 보완하고 시합하는 일들을 반복하면서 내 컬러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대표팀은 길어야 9일, 짧으면 3, 4일 만에 소집해서 훈련하고 경기를 치른다. 문제는 클럽팀을 이끌며 받는 1년간의 스트레스가 대표팀에서 받는 10일 정도의 스트레스와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잘하면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쌓게 되고,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엔 마치 융단 폭격을 맞듯 욕을 얻어먹는다. 그런 점에서 난 아마 오래 살 것 같다(웃음).”
―이번 20세 이하 대표팀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 것 같나. 8강 진출 실패로 축구팬들의 실망이 엄청났었다.
“이렇게 말하면 변명 같지만 우리가 예선을 통과한 것만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축구팬들의 눈높이가 높아서 그렇지 선수 개개인의 기량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예선 통과도 기적이었다. 21명의 선수들 중에 연세대 선수들은 학점 미달 참가제한 조치로 아예 U리그를 뛰지 못했고, 프로 선수들도 대부분 K리그에서 벤치 신세로 머물렀다. 제대로 경기에 뛴 선수가 5명 정도밖에 안됐는데 이런 선수들을 데리고 기니, 아르헨티나를 꺾고 16강에 진출한 것도 대단한 것이다. 상대는 유럽 리그에서 실제 경기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기량 차이가 엄청났다. 실력과 경험에서 차이가 큰데 어떻게 그걸 이길 수 있겠나. 그런 상황에서도 선수들이 정말 최선을 다했다. 300~400명 관중들 속에서 축구하던 아이들이 3만~4만 명 관중들 앞에서 뛸 때 심리적으로 얼마나 압박을 받았겠나. 포르투갈 전에서는 선수들이 갖고 있던 기량이 60%밖에 발휘되지 못했다. 80%만 보여줬어도 우린 ‘대박’이 났을 것이다. 우리는 예선전부터 100% 힘을 쏟았다. 그래야만 상대팀들과 엇비슷하게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매 경기를 결승전처럼 치른 셈이다. 그게 포르투갈전에서 한계로 다가왔다.”
―혹시 포르투갈과의 16강전을 앞두고 선수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예상했었나.
“선수들 경기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매 경기마다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단 미팅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포르투갈만 넘어서면 그 다음부터는 상상한 것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다. 오늘 경기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의 100%, 200%를 발휘해 달라. 그러면 우린 승리한다’라고.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까 그동안 쌓인 피로감이 그라운드에서 나타났고, 1-3 패배를 당했다.”
―지난 3월 조 추첨식에서 마라도나가 A조에 아르헨티나를 뽑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때부터 U-20 축구대표팀이 속한 A조는 기니, 잉글랜드, 아르헨티나가 속하면서 ‘죽음의 조’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감독은 8강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의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봤나.
“지난 1월 포르투갈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만 해도 참담했다. 선수들 기량을 봤을 땐 홈에서 망신당할 거란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내심 조추첨 결과를 기대했다. 설마 우리가 아르헨티나, 잉글랜드랑 한 조가 되겠어? 했는데 그대로 됐다. 그러다 제주에서 월드컵 전초전 성격인 20세 이하 4개국 초청대회를 치렀고,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우승을 차지하면 자신감이 붙었다. ‘아, 조금만 더 손을 보면 우리도 뭔가 할 수 있겠다’ 싶더라. 그래서 8강 진출이 목표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까 상대팀은 거의 정예 멤버들을 데려왔더라. 유망주가 아닌 실제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었다. 수백억 원의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들 말이다.”
―언론에서는 신 감독이 선수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에 주목했다.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최대한 자율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처음에는 나도 혼란스러웠다. A대표팀을 거쳐 23세 이하 올림픽대표팀을 보고 오니까 내 눈은 20세 이하 선수들을 보면서 그 이상을 기대하게 되더라. 자꾸 선수들의 부족한 부분만 눈에 띄었다. 이렇게 가다간 안 되겠다 싶어서 얘네들 나이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를 떠올렸다. 이성에도 관심이 많았고, 감독 모르게 술도 먹으러 다녔던 나이다. 나도 했는데 선수들을 못하게 하는 건 이율배반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선수들의 생활을 많이 이해해주려고 했다. 보통 선수단 미팅을 하면 대부분의 선수들은 정자세로 앉아 있다. 그런 모습이 답답해 보였다. 누워도 되고 벽에 기대도 되니까 무조건 편한 자세를 취하라고 말했다. 그때부턴 책상에 다리도 올려놓고,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한 놈도 나오고…. 선수들 모습이 재미있었다.”
―기니와 아르헨티나를 연파하며 2연승으로 일찌감치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후 잉글랜드전에선 이승우, 백승호 등 정예 멤버를 출전시키지 않아 말들이 많았다.
“잉글랜드 선수들의 평균 신장이 188cm였다. 그런 선수들을 상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했다. 높이와 힘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이승우, 백승호를 주전으로 뛰게 할 경우 부상 위험이 높았다. 그리고 어느 감독이 16강 진출을 확정시켜 놓고 베스트 11을 풀가동시키나.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면 정예 멤버를 출전시켰겠지만 두 선수가 나간다고 이기는 보장도 없고, 우린 16강전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파워를 겸비한 선수들이 더 좋은 경기를 보여줄 거란 기대를 갖고 3-5-2전술을 펼쳐갔다. 결과를 놓고 이승우 백승호를 왜 처음부터 출전시키지 않았느냐고 말하면 답하기가 어렵다.”
―포르투갈전에서 본래 공격수 이승우, 백승호를 윙어로 배치하는 4-4-2 측면 수비가 부실했다거나 너무 실험적이고 공격적인 전술로 인해 패배를 자초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4-4-2 전술은 이기려고 쓴 카드였다. 전반부터 상대를 강하게 압박하면 후반전에는 상대의 체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전반전에서 두 골을 먼저 헌납하고 말았다. 전반을 0-0으로만 끝내도 후반에는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토너먼트 경기에선 공격보다 수비를 더 안정적으로 두고 가는 게 맞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배운 게 많다. 나보단 선수들이 이번 대회를 통해 더 많이 배웠을 것이다. 임민혁이 잉글랜드전을 마치고 와선 내게 ‘선생님, 앞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라고 말하더라. 직접 부딪혀보니까 유럽 선수들의 힘이 엄청나다는 걸 느낀 것이다. 포르투갈전에서 패하고 많은 선수들이 울었다. 선수들의 눈물이 아쉬운 눈물로만 끝나지 말고 발전의 눈물로 승화되길 바란다. 나도 진짜 복 받은 놈이지만 이번 20세 이하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도 복 받은 것이다. 이런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지적된 문제점이지만 이번 대회에서도 한국 선수들의 개인기 부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학원 축구 지도자를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학원 축구는 기본기를 가르치기보단 경기에서 결과를 얻으려 하다 보니 선수들은 기본기보다는 성적 내는데 더 집중한다. 초·중학교에선 기본기를 탄탄히 배우고, 고등학교에서부턴 실전 경기를 펼치는 방법으로 전체적인 틀을 잡아간다면 한국 축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린 선수들을 대표팀에 뽑아 놓으면 볼 컨트롤은 물론 기본적인 패스도 어려워하는 선수가 있다. 공격만 하고 수비는 하지 않으려 한다. 모두 메시가 되기를 바라지만 경기력은 뒷받침되지 않는다. 나이 어린 선수들이 나보다 전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2020 도쿄올림픽 감독 후보로도 꼽히고 있는데.
“지금은 미리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남이 주지도 않는 걸 갖고 ‘만약’이란 생각으로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놀기도 바쁜데(웃음).”
신태용 감독은 A대표팀 시절 감독으로 인연을 맺은 슈틸리케 감독에 대해 “대표팀 감독이란 자리가 원래 욕먹는 자리다. 그걸 감당할 자신 있으면 계속 있는 것이고, 욕먹기 싫으면 내려오면 된다”고 간단히 정리했다. 한국 축구를 대표했고, 대표하는 박지성과 손흥민을 비교하는 질문에선 “인성은 지성이가, 축구는 흥민이가 더 낫다”고 답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