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얼굴에 수많은 상처…이런 자살은 없다”
국정원은 ‘적폐청산 TF’를 가동해 마티즈 안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직원 임 아무개 씨 사건을 재조사하기로 했다. 사진은 서훈 국가정보원장. 박은숙 기자
2015년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둔 해킹 전문 회사 ‘해킹팀’의 고객 명단이 다른 해커들의 공격으로 유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도 포함돼 있었다. 국정원은 2012년부터 ‘5163부대’라는 대외용 명칭을 사용해 여섯 차례에 걸쳐 약 8억 원을 들여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이 한국의 메신저 앱과 한국산 스마트폰에 대한 해킹을 문의한 사실도 알려지면서 민간인 사찰 의혹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대북 감시용’ ‘연구용’이라며 일축했다.
국정원 팀장급 간부였던 임 아무개 과장은 해킹 프로그램 구매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됐다. 임 과장은 2015년 7월 14일부터 사흘간 강도 높은 특별감찰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임 과장은 7월 18일 오후 12시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화산리의 한 야산 중턱에서 자신의 마티즈 차량 안에 번갯불을 피워놓고 숨진 채 발견됐다. 마티즈 차량 안에선 ‘해킹팀 유출 사건은 민간인 사찰과 무관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나왔다.
국정원은 해킹 프로그램을 활용해 2012년 대선에 개입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민간인을 사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였다. 임 과장이 유서에 “증거를 삭제했다”고 남긴 것을 두고도 야당은 “정당한 대북 활동이었다면 증거를 지울 이유가 없고 국정원 직원이 정보를 마음대로 삭제했다는 것 역시 부자연스럽다”고 반박했다. 여야는 국회 차원의 ‘국정원 해킹 특위’를 만들었으나 국정원이 자료 제출을 거부해 조사는 무산됐다. 게다가 의혹의 핵심 관계자가 숨져 진상규명은 흐지부지됐다.
# 보이지 않는 손 움직였을까
임 과장은 7월 18일 오전 5시경 출근을 한다며 집을 나섰다. 임 과장 부인은 오전 10시께 “임 씨가 오전 5시쯤 밖으로 나간 뒤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관할 소방서에 신고했다. 소방서는 휴대폰 위치추적을 통해 수색을 벌이던 중 낮 12시에 숨진 임 과장을 발견하고 경찰에 알렸다.
이를 놓고 세간에는 수많은 의문이 제기됐다. 전병헌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국정원 직원이 번개탄을 피우고 자살했다는 마티즈의 번호판이 녹색인데, 경찰 수사에서 나온 CCTV에서 국정원 요원이 운행했다고 하는 차량의 번호판은 흰색이다. 녹색을 흰색으로 우기는 이런 행위야말로 진실을 거짓으로 덮으려는 상징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과수는 CCTV 속 마티즈 차량 번호판은 녹색이라고 밝혔다. 국과수 관계자는 “차량번호판 색상은 촬영 및 녹화 조건에 따라 다르게 관찰될 수 있다. 특히 차량번호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해상도에서는 밝은 색 부분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녹색 번호판이 흰색 번호판으로 색상왜곡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정원 직원이 경찰보다 빨리 현장에 도착한 점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남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임 과장 자살사건 현장에 국정원 직원이 경찰보다 50여 분 빨리 도착했다”고 했다. 또 현장 기록 구급차 블랙박스에서 28분 분량의 영상이 사라진 점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중앙소방안전본부는 “구급차 시동을 껐기 때문에 영상이 찍히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박남춘 의원은 “시동을 꺼서 블랙박스가 꺼졌다면 다시 시동을 켰을 때 영상에 (구급차가) 정지된 화면부터 나와야 하는데 재개된 영상을 보면 움직이는 화면이 나온다. 이를 어떻게 신뢰하냐”고 되물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94일 만인 2015년 10월 20일 “불거진 의혹은 많지만 조사 결과를 보면 단순 자살이 명백했다”며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 임 과장 부친, 아들 타살 주장
국정원은 ‘적폐청산 TF’를 가동해 이 사건을 재조사하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 임 과장 유족이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임 과장 부친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자살은 없다. 얼굴을 보면 안다”며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아들(임 과장)의 얼굴에 상처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놀랐다. 몸이 저렇게 당할 정도면 뼈까지 상했을까 걱정돼 오죽하면 감정(부검)을 해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임 과장 부친은 경찰 외압도 주장했다. 그는 “아들의 장례식 당시 경찰이 ‘만약에 (상황이) 뒤집어지게 되면 말썽이니까 좀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언론 등 외부와의 접촉으로 상황이 바뀌면 장례 일정이 길어지는 등 번거로울 수 있으니 이를 피하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임 과장 부친은 이를 ‘협박’으로 받아들였단다. 이어 그는 “손녀(임 과장 딸)가 육사에 들어가 있으니 앞으로 피해가 있을까 걱정돼 덮으라고 한 며느리의 만류가 한 원인이었다”라고 침묵한 이유를 덧붙였다.
여당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김현 민주당 대변인은 7월 13일 브리핑을 통해 “가족들의 합리적인 의심과 의혹 제기에 당국은 진실규명으로 화답해야 한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 대변인은 “새로운 국정원 지휘부는 적폐청산 TF에서 임 과장 타살의혹과 함께 선거개입 및 민간인 사찰 부분도 철저히 조사하여 불법이 있다면 엄정한 법집행으로 단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