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도 혼인 파탄 책임’ 증거 확보했을 수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9일 노소영 관장에 대한 이혼 조정을 신청한 사실이 알려졌다. 사진은 2003년 9월 22일 보석으로 풀려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부인 노소영 씨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서울구치소를 떠나는 모습. 연합뉴스
최 회장은 지난 7월 19일 서울가정법원에 노 관장과의 29년 결혼 생활을 마무리할 이혼 조정을 신청했다. 이들의 부부 관계가 위태롭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 들리던 풍문이 아니다.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재계에서 이들의 불화설은 조용히 확산되고 있었다.
본격적인 불화설과 이혼설이 터져 나오게 된 것은 2012년의 일이다. 2000년대 초중반 검찰의 SK그룹에 대한 수사가 이어질 무렵부터 최 회장은 노 관장과의 결혼 생활을 마무리할 생각을 품어왔다고 한다. 그룹에 악재가 겹치고 있는 상황에서 노 관장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공공연히 해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 최 회장 측근의 말이었다. 최 회장은 이외에도 “검찰 수사 이후부터 노 관장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라는 하소연을 주변에 해왔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혼설이 터지기 약 10개월 전인 2011년 9월부터 이들이 별거를 시작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 때는 검찰이 SK그룹 계열사의 자금 횡령 혐의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하던 시점이다. 불화설의 실체가 드러났을 당시, 이미 10개월 이상 별거 중이었다면 이들의 사이는 알려진 것보다 더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노 관장은 지속되는 불화설과 이혼설에 대해 공식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으며, 201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사면된 직후 최 회장 역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사면 후 약 4개월 뒤인 같은해 12월, 최 회장이 폭탄을 하나 던진다. 자신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노 관장과의 사이에서 깊어진 갈등의 골을 좁힐 수 없다고 느꼈고, 그 와중에 새로운 여성을 만나 그 사이에 자녀까지 뒀다고 직접 고백한 것.
2015년 8·15 특별사면으로 출소해 심경을 밝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손에 든 성경이 눈에 띈다. 사진=임준선 기자
<세계일보>에 이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낸 최 회장은 2010년경부터 노 관장과의 이혼소송을 준비해 왔으며, 이 시기 동거인 김 아무개 씨(42)와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편지의 말미에 “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 아이와 아이 엄마를 책임지려고 한다. 두 가정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옳지 않기 때문”이라며 노 관장과의 이혼 결심을 확고히 밝히기도 했다.
노 관장은 최 회장의 외도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노 관장은 이미 최 회장과 그의 동거인 김 씨 사이에 자녀가 태어난 사실을 알고도 6년 동안 참아왔다고 전했다. 최 회장의 혼외자녀가 태어난 시점은 간통죄가 폐지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노 관장은 얼마든지 최 회장과 김 씨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 관장은 “이혼만은 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해 왔다.
최 회장이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한 것에 대해 한 재계 관계자는 “노 관장에 대한 압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 대통령의 딸이고 대기업 회장의 부인이 여성지 가십거리에서나 볼 법한 외도와 혼외자녀 논란에 공개적으로 휘말린 것은 자존심에 굉장한 상처가 됐을 것”이라며 “이혼만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노 관장을 마지막까지 몰아붙이면서 결국 원하는 결과(합의 이혼)를 얻고자 하는 계산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의 이런 폭탄 발언에도 노 관장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더 나아가 “혼외자녀도 내가 양육하겠다”는 뜻까지 밝히기도 했다. 양측이 원하는 바가 상이한 만큼 이혼 절차가 이뤄지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이후 약 1년 반가량 이들과 관련한 별다른 언론 보도가 나오지 않은 것도 이같이 지지부진한 상태가 지속됐기 때문이었다.
사실 최 회장이 노 관장과 정식으로 이혼 소송에 돌입할 경우 최 회장의 완패는 예견돼 있었다. 아무리 최 회장 측이 노 관장과의 결혼생활이 성격 차이 등으로 초반부터 순탄치 않았다고 주장한들, 불륜을 하고 혼외자녀를 낳은 사실만으로도 혼인 파탄에 있어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회장은 2년이라는 침묵을 깨고 노 관장에 대한 이혼 조정을 신청했다. 상세한 신청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간 최 회장 측이 주장해 왔던 부부관계 파탄의 이유가 주가 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미 오래전 부부관계가 파탄 나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정되거나, 파탄을 인정하면서도 배우자가 ‘보복 감정’으로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등에 한해서만 법원은 유책 배우자의 이혼청구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최 회장은 이런 ‘파탄주의’ 해석을 노리고 이혼 조정을 청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유책주의에 따른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에서 최 회장 측이 법원의 다른 해석을 노려 이 같은 모험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최 회장 측이 부부관계 파탄의 책임을 노 관장에게 물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
일각에서는 “노 관장이 2015년 최 회장의 광복절 특별사면을 앞두고 청와대에 직접 남편의 사면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보냈는데 이를 파탄의 한 근거로 내세우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지난 19일 최 회장 측이 제출한 이혼 조정 신청서에 이 서신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더욱이 당시 알려진 서신의 내용으로 파악했을 때 노 관장은 최 회장의 사면에 대해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 근거로 들었기 때문에 이를 사적인 보복 감정으로 판단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이혼 소송 전문 변호사는 “오랜 기간 별거해 부부관계 파탄의 책임 소재를 어느 한 쪽에게만 묻기가 어렵다면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가 받아들여질 수는 있으나,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사례는 최 회장이 부부관계가 해소되기 전 먼저 새 가정을 꾸렸다는 점이 가장 큰 유책 사유”라고 지적했다.
이어 “유책 사유와 그 정도를 고려하더라도 이혼이 합당하다는 결정이 나기 위해서는 이혼 전후 쌍방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인데 이들의 경우는 이혼 후 유책 배우자인 최 회장에게 다소 유리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혼 조정 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조정 신청 사건은 서울가정법원 가사12단독 이은정 판사에 배정됐다. 이후 조정기일이 잡히면 양측과 조정위원, 판사가 참석한 가운데 협의해 이혼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조정이 결렬될 경우 정식 이혼 소송으로 이어지며, 재산 분할은 소송 중 논의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