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던 필기구로 협박편지 작성 ‘헉!’
1990년 8월 6일에 콜로라도의 보울더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존버네이 램지. 아버지 존 램지는 컴퓨터 시스템 회사를 이끄는 CEO로 47세의 나이에 늦둥이 존버네이를 얻었다. 엄마인 팻시는 1977년 미스 웨스트버지니아로 뽑혔던 미인. 딸 존버네이를 끊임없이 어린이 미인 대회에 내보낸 건, 어쩌면 엄마의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존버네이 램지는 수많은 어린이 미인대회를 석권하며 이름을 알렸지만 6세의 나이에 살해당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다. 팻시는 5시 52분에 부엌 계단 난간에서 세 장의 종이를 발견한다. 협박 편지였다. 자신들을 외국인 일당이라고 밝힌 자들이 써놓은 것으로, ‘아이를 유괴했고 해치지 않았으니, 11만 8000달러를 보내면 살려준다’고 써 있었다. 10만 달러는 100달러짜리 지폐로, 나머지는 20달러짜리로 준비하라고 적혀 있었고, 종이봉투에 넣어 명령하는 곳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 아침 8~10시에 전화를 줄 것이며, 그 전에 경찰이든 FBI든 알리면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마무리되었다. 수신인은 아이의 아버지인 존. 마지막 문장은 “존, 당신에게 달렸어!”였다.
팻시는 협박을 따르지 않고 곧장 신고했고, 3분 만에 두 명의 경찰이 왔다. 경찰은 2층에 있는 아이의 침실을 통제 구역으로 설정했다. 이후 친구와 지인들이 달려와 램지 부부와 당시 9살이었던 아들 버크를 위로했다. 8시가 되자 린다 안트 경사가 도착해 가족과 함께 유괴범의 전화를 기다렸다. 한편 존은 돈을 구하러 나갔다.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경찰은 집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침입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린다 경사는 존에게 집 안에 혹시 있을지 모르니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존은 친구인 플리트 화이트와 함께 3층짜리 저택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지하 와인 창고에서 딸을 발견했다. 흰 담요에 덮인 존버네이는 머리에 둔기로 맞은 자국이 있었고 목이 졸린 상태였다. 손목은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었고 입엔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검시 결과 사인은 두개골 손상과 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 위엔 아직 소화되지 않은 파인애플이 있었다. 레깅스와 셔츠 차림이었다. 일반적으로 아이 엄마가 재울 때 입히는 옷은 아니었다. 정액처럼 직접적인 성 폭행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천으로 아이의 하체 부분을 닦아낸 흔적은 있었다. 아이의 목을 조를 때 그림 그리는 붓을 부러트린 후 거기에 나일론 줄을 묶어 사용했는데, 붓의 나머지 조작은 아이의 음부 안에서 발견되었다.
수사는 혼선을 빚기 시작했다. 아이의 침실만 통제한 탓에, 어쩌면 집 전체에 흩어져 있을 범죄의 증거들이 친구와 지인과 심지어 경찰들에 의해 상당 부분 훼손됐다. 아이의 아빠는 지하에서 발견한 아이를 직접 안고 거실로 올라왔다. 현장 보존 자체가 엉망이었던 셈이다. 입에 붙은 테이프도 존이 직접 떼었다. 의문도 줄을 이었다. 협박 편지엔 그 누구의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요구한 11만 8000달러라는 구체적 금액은, 존이 연초에 받은 보너스 금액과 일치했다. 편지는 그 집에 있던 종이와 연필로 작성한 것인데, 유괴범이 집에 들어와 그곳에서 협박 편지를 작성한다는 건 상식 밖이었다. 게다가 세 장에 달하는, 적어도 쓰는 데 20분은 걸리는 장문의 편지였다. 아이를 유괴하러 새벽에 들어와서 거실에 앉아 20분 동안 편지를 쓴 후 부엌에 그 편지를 놔둔 후, 아이를 데리고 지하실에 내려가 죽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램지 모녀
편지에 대한 분석도 흥미로웠다. 영화 <더티 해리>(1971)와 <스피드>(1994)의 대사를 차용한 편지를 분석하던 프로파일러는, 글에서 어떤 모성성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리고 마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글 쓴 사람의 모국어는 영어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협박 편지에 느낌표 같은 부호를 사용한 것도 특이하다고 밝혔다. 경찰은 아이의 엄마를 의심했고 필적 대조가 이뤄졌다. 필적 감정사는 3주 동안 면밀히 분석한 후 작은 단서를 내놓았다. 편지에선 알파벳 A를 네 가지 방식으로 쓰고 있는데, 이런 특징은 팻시 램지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편지를 그녀가 썼다고 단정 내릴 수는 없다고 했다.
부실한 현장 보존도 문제였지만, 수사는 이렇다 할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유괴를 위해 누군가가 집에 침입했다? 그런데 아이는 집 안에서 죽어 있었다.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와 아이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지하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아래 신원을 알 수 없는 신발 자국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창틀에 있던 거미줄은 그대로였다. 그 안으로 들어오면 분명 거미줄은 모두 헝클어져 있어야 했다. 그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부정확했다.
결국 경찰은 가족을 의심했다. 그러나 동기가 부족했다. 왜 이토록 예쁜 딸은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야 했단 말인가.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졌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누구였던 걸까?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진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