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외자 문제 포함 은밀한 내용 모으라” 비선 통해 사정기관 인사에 지시 정황
청와대 전경.
2013년 4월 채동욱 서울고검장이 박근혜 정부 첫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자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다소 의외란 반응이 많았다. 정권과 코드가 통할 것으로 예상되던 다른 경쟁자들이 유력하게 거론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부적격 사유가 드러나면서 탈락했고, 결국 ‘채동욱 카드’가 낙점됐다.
검찰총장추천위원회를 통해 추천된 채동욱 전 총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이례적으로 야당 의원들의 칭찬을 받으며 검찰 수장 자리에 올랐다. 인사청문회 실시 이후 야당으로부터 적격 판정을 받은 검찰총장은 채 전 총장이 처음이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이 청문회에서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온다”라고 말해 한때 여의도에선 ‘파도미남’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정권에 빚을 진 게 없어서일까. 채 전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박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친박 진영과 마찰을 빚는다. 2012년 대선 때 국가정보원 여직원이 오피스텔에서 문재인 비방 글을 올리다 적발된, 이른바 국정원 댓글수사를 놓고서다. 채 전 총장은 2013년 4월 18일 서울중앙지검에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팀장으론 아끼는 ‘특수통’ 후배인 윤석열 검사(현 서울중앙지검장)을 임명했다.
채 전 총장은 수사팀에 성역 없는 수사를 당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관계자는 “당시 수사가 제대로 되겠느냐라는 회의적인 기류가 우세했다. 임기 초반이었던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사를 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라면서 “그런데 채 전 총장이 원칙을 강조하면서 수사팀에 힘을 실어줬다. ‘강골’인 윤석열을 팀장으로 발탁한 것도 채 전 총장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됐다”라고 귀띔했다.
수사팀은 채 전 총장 엄호 아래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을 파헤쳐 나갔다. 그러나 ‘채동욱의 원칙’은 정권 실세들을 불편하게 했다. 특히 채 전 총장이 정권 핵심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세훈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적용을 밀어붙이자 비토 기류가 급격히 확산됐다. 수사팀은 2013년 6월 11일 원 전 원장을 기소했다. 한 친박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MB 사람인 원세훈을 우리가 비호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원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을 적용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 전 원장이 국정원 대선 개입과 관련해 유죄를 받을 경우 이는 박근혜 정부 정통성에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방법으로 탄생한 정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 있었다. 그래서 ‘큰집(청와대)이 채 전 총장에게 강한 ‘푸시’를 넣었던 것으로 안다.”
원 전 원장 기소는 여권의 권력 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채 전 총장을 겪으면서 검찰 장악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박 전 대통령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2013년 8월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김 전 실장은 ‘왕실장’으로 불리며 정권 2인자로 급부상했다. 앞서의 친박 의원은 “채 전 총장을 보면서 검찰을 길들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등장한 인물이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출신의 김기춘”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정권과 갈등을 빚던 채 전 총장은 2013년 9월 혼외자 논란으로 사퇴했다. 수사팀을 이끌던 윤석열 검사는 2013년 10월 상부 승인 없이 국정원 직원에 체포영장을 집행하고 압수수색을 벌였다가 직무에서 배제됐다. 윤 검사는 10월 21일 국정감사에 나와 서울중앙지검장을 비판하는 등 ‘항명 파동’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 후 윤 검사를 비롯한 댓글수사팀은 박근혜 정부 내내 한직을 맴돌다가 현 정권 들어 대부분 요직에 복귀했다.
그런데 채 전 총장이 원 전 원장 기소를 두고 뜻을 굽히지 않던 2013년 5월경 청와대 핵심 참모 2명과 친박계 전·현 의원 2명, 총 4명이 국정원 댓글 수사에 대한 대응책 마련을 논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청와대 내부와 인근에서 수시로 모여 검찰 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한 친박 전직 의원은 “청와대 참모가 주도했다. 기존 시스템이나 인력으로는 검찰을 컨트롤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특히 채동욱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고 귀띔했다. 사정당국 고위 관계자 역시 “채 전 총장을 어떻게 컨트롤할지가 최대 화두였다”면서 “채 전 총장과 함께 갈 수 없다는 결론도 여기서 나왔다”라고 했다. 사실상 채 전 총장을 찍어내기 위한 대책회의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무렵부터 채 전 총장에 대한 광범위한 사찰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앞서의 모임에서 모종의 지시가 내려진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사정당국 고위 관계자도 “현직 검찰총장에 대해 자료를 모은다는 것은 정권 최고 실세가 개입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또 공식라인으로도 힘들다”면서 “당시 혼외자 문제를 포함해 채 전 총장의 은밀한 내용을 모으라는 지시가 비선을 통해 한 사정기관 인사에게 떨어졌다”고 말했다.
채 전 총장 혼외자 논란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이 개입됐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검찰은 “화장실에서 들은 (채동욱 혼외자)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라는 직원의 말을 근거로 단독 범행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 직원은 2014년 11월 1심에서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지만 2016년 1월 항소심에선 벌금형으로 감형됐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의미심장했다. ‘몸통’은 놔두고 상부 지시에 따랐던 개인만 처벌하는 것은 형평성에서 문제가 있다는 게 골자였다. 판결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고의 범행이 비록 비난 가능성이 크지만, 이는 결국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검증하는 등의 구실로 검찰 수사를 방해하고자 하는 모종의 음모에 따라 국정원의 상부 내지는 그 배후 세력 등의 지시에 따라 저질러졌을 것임이 능히 짐작된다. 위와 같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아동의 개인정보 조회 및 수집을 지시한 국정원 상부 내지는 그 배후 세력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은 채 이에 대한 책임을 이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개인에게만 모두 돌리는 것은 처벌의 형평성에 크게 어긋난다.”
채 전 총장은 혼외자 논란으로 낙마했다. 채 전 총장 도덕성과는 별개로 여기에 정권 실세들의 ‘찍어내기’ 의도가 있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은 청와대 참모와 정치인이 모여 현직 검찰총장 거취를 논의했고 또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비선을 활용, 사정기관까지 동원해 개인 비리를 수집했다. 법원에서도 판결문을 통해 배후가 있을 것으로 봤다. 국정원 적폐청산 TF는 현재 채 전 총장에 대한 사찰이 있었는지 확인 작업 중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