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잠잠해지자 슬그머니 거래 늘려…쌍둥이 회사 만들어 몰아주기도
아모레퍼시픽과 친족기업 태신인팩의 거래액이 최근 다시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서경배 회장. 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그러나 태신인팩은 이후에도 아모레퍼시픽, 에뛰드, 이니스프리, 에스트라, 퍼시픽글라스 등 아모레 계열사와 꾸준히 거래해오며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기준 태신인팩의 전체 매출 중 80%가량이 아모레 계열사에서 나왔다.
아모레의 인쇄분야 계열사 ‘퍼시픽패키지’도 태신인팩에 뿌리를 둔 회사다. 2010년 아모레는 태신인팩을 자회사로 편입하고 두 달 뒤 태신인팩 청원공장의 제조 및 판매 사업 부문을 인적분할해 퍼시픽패키지를 신설했다. 한 인쇄업체 관계자는 “두 회사는 사실상 같은 회사로 인식돼 있다”고 말했다.
규모가 작은 태신인팩이 주목을 받는 까닭은 서경배 아모레 회장의 친족 기업이기 때문이다. 서명현 태신인팩 대표와 서경배 회장은 5촌 관계다. 서경배 회장의 형인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도 2009년까지 태신인팩의 2대 주주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태신인팩은 친족기업인 아모레를 등에 업고 성장했다. 1999년 310억 원이던 태신인팩의 매출액은 10년 뒤인 2009년 567억 원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2010년 아모레는 퍼시픽패키지를 신설하면서 태산인팩과 거래 규모를 줄였다. 매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아모레의 일감이 줄어들면서 태산인팩의 매출은 1년 만에 410억 원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모레 외에 마땅한 매출처가 없는 영향도 컸다.
그러나 최근 아모레와 태신인팩의 거래액이 다시 증가하는 것이 눈에 띈다. 2014년 178억 원까지 줄어들었던 두 회사의 거래액이 지난해 220억 원을 기록하며 다시 늘어난 것. 아모레는 “다른 협력업체와 마찬가지로 태신인팩의 기술력이 뛰어나 공개입찰로 선정됐을 뿐”이라는 입장을 표한다. 아모레 관계자는 “태신인팩은 이 분야에서 선도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업체로 반품률이 낮고 공정률도 좋아 특별히 배격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아모레가 과거 태신인팩에 몰아주던 일감을 지금은 태신인팩과 퍼시픽패키지에 양분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아모레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퍼시픽패키지는 태신인팩에서 분할된 회사기 때문에 사실 기술력에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두 회사 모두 단상자와 지함을 주로 만들고 같은 브랜드의 서로 다른 라인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대기업과 계약을 맺고 있는 한 패키지업체 관계자는 “인쇄업체는 어느 정도 역사가 있으면 기술력에 별 차이가 없다“며 ”특히 대기업과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단연 단가”라고 설명했다. 경쟁업체인 LG생활건강도 단가와 경쟁력을 고려해 현재 21곳이 넘는 인쇄업체와 포장 관련 거래계약을 맺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모레가 자사와 관련된 일감 몰아주기 이슈가 잠잠해지고 공정거래법상 규제를 받지 않자 슬그머니 태신인팩과 거래량을 늘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아모레는 태신인팩과 ‘친족분리’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거래 비중과 상관없이 일감 몰아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정 독립경영 요건을 충족시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친족분리를 인정받은 기업은 대표가 친인척이어도 거래에 대한 규제를 받지 않는다. 아모레 관계자는 “5촌이면 먼 친척인 데다 지금은 태신인팩에 아모레퍼시픽의 지분이 전혀 없다”며 “3년 전 공정위에 태신인팩이 아모레그룹의 계열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고 이 내용이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친족 분리가 오히려 친족 간 일감 몰아주기를 조장한다는 시각도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현행 기준상 친족 분리를 인정받는 데 중요한 요건은 거래량이 아니라 상대 주식 소유 유무, 임원 겸임, 채무·보증 관계다”라며 “친족 분리를 인정받았다면 일감을 몰아줬다 하더라도 제재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아모레와 태신인팩이 친족 분리 과정을 거치면서 두 회사 대표가 모두 이득을 봤다고 말한다. 2010년 5월 인적분할 과정에서 태신인팩의 자본금은 2009년의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서명현 대표의 지분율은 23.94%에서 88.33%로 상승했다. 또 신설된 퍼시픽패키지는 서경배 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아모레퍼시픽그룹이 99.58%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지난해 기준 아모레 계열사와 거래 비중이 전체 매출의 92%를 차지한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