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화 김제동 등 총 82명…밥줄 운운 회유·압박 안통하면 폐지·퇴출시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6월 2일 오후 서울 삼성동 사무실을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요신문DB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시절에 작성된 이른바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 명단을 찾아냈다. 이 리스트는 원 전 원장 재임 초기인 2009년 김주성 전 기조실장 주도로 ‘좌파 연예인 대응 TF’에서 만들어졌다. 김 전 실장은 이 전 대통령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은 82명이다. 소설가 이외수 조정래 등 문화계 인사 6명, 배우 문성근 유준상 등 배우 8명이 포함됐다.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를 비롯한 영화감독은 52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들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 5월 민주노동당 지지를 선언했던 감독들이다. 이 외에도 김미화 김구라 김제동 등 방송인 8명과 윤도현 김장훈 신해철 등 가수 8명이 올랐다.
국정원은 ‘대통령에 대한 언어 테러로 명예를 실추’ ‘좌성향 영상물 제작으로 불신감 주입’ ‘촛불시위 참여를 통해 젊은 층 선동’ 등을 사유로 이들에 대한 압박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정원 개혁위원회에 따르면 좌파 연예인 대응 TF는 블랙리스트 인물들의 프로그램 폐지, 소속사 대상 세무 조사, 편성 관계자 인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을 제재한 것으로 조사됐다.
소설가 이외수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블랙리스트에 대해 “‘젊은이들을 선동했다’고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SNS에서 줄곧 부정과 부패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돌직구를 해왔다. 방송이 다 섭외가 이루어졌다가 한 2~3일 남겨놓고 무산되거나 이런 적은 많다”고 밝혔다.
방송인 김미화 씨 또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당했던 의심스러운 정황들을 공개했다. 김 씨는 “생방송 라디오를 진행할 때 어떤 남자들이 들어와 대본을 봐야겠다고 했다. 국정원 직원인지 경찰인지 모른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이 집에 찾아왔고, 그 사실을 방송에서 이야기했을 때 국정원이 사실이 아니라며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언론에 보도 자료를 낸 것은 팩트”라고 말했다.
방송인 김제동 씨는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노제 사전 행사를 진행하고 2010년 서거 1주기 때 사회를 봤다는 이유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국정원 개혁위원회에 따르면 국정원의 지시에 따라 2009년 7월 MBC는 김제동이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 <환상의 짝꿍-사랑의 교실>을 폐지했다.
2010년 1주기 행사를 앞두고 김 씨는 실제 국정원 직원을 만났다고 한다. 그 직원은 “노제 때 사회를 봤으니 1주기 때는 안 가도 되지 않겠냐. 방송 계속 해야 하지 않느냐”고 회유했다. 김 씨가 버티자 그 직원은 “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사람이다. VIP(이명박 전 대통령)가 김제동 씨 걱정을 많이 한다”며 압박했다.
배우 유준상 씨는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항의 글을 올렸다. 유 씨는 고 노 전 대통령 분향소가 강제 철거된 5월 26일 “너무 너무 화가 난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유 씨는 “이건 아니다. 국민의 소리를 듣고 이 게시 글들을 다 보라. 그리고 부끄러워하시라. 반성하고 사과하라. 정치하는 분들 참 부끄럽다”고 글을 남겼다. 유 씨의 소속사에서는 “유 씨가 올린 글이 맞다”고 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 씨와 같은 소속사 배우인 이준기 씨는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 SNS에 “국민을 섬기기는 싫은 거지”라며 촛불 집회 참가자에 대한 강경 진압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 씨는 “강경진압, 강제연행 등은 역사 속에 익숙한 단어들이다. 큰 선거 때나 국민을 섬기네 마네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로 눈시울 붉히기나 하지 도대체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게 있나. 정신 좀 차리자”라고 꼬집은 바 있다. 유 씨와 이 씨 소속사 관계자는 “왜 블랙리스트에 올랐는지 모르겠다. 국정원에 물어봐야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강경 대응에 나선 인사도 있다. 배우 문성근 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을 고소할 예정이다. 문 씨는 “검찰의 수사로 문화부까지는 어떻게 블랙리스트가 전달됐는지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영화진흥위원회로, 각 방송국으로, 방송국 PD에게로 전달된 과정이 있을 것인데 이번 고소를 통해 그걸 파악하면 이 단계들이 그려질 것 같다. 그래서 방송국 구성원들의 조각 정보를 모아, MB 정부가 그린 그림을 조합해보려고 한다”고 전했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블랙리스트 연예인 측은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한 인사는 “질문은 사양하겠다”고 전했다. 한 소속사는 “연예인이 정치적 사건에 언급되는 것은 그 일이 좋은 일이든 아니든 간에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안 좋은 일이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코멘트 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또 다른 소속사는 “민감한 부분이라서 말할 게 없다. 정치적 사건에 연예인이 언급되는 게 부담스럽고 불편하다”고 말했다.
한편, 국정원 개혁위원회에 따르면 국정원은 MB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9월 14일 원세훈 전 원장과 김주성 전 기획조정실장을 국정원법상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검찰은 국정원 자료를 넘겨받아 곧바로 검토에 착수했다. 검찰 관계자는 “피해자는 더 있을 수도 있다. 피해 사례는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