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용 구속으로 경영 리스크 해소…김승연 ‘결단’만 남아
국내 최대 방산업체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문재인 정부 첫 대형 수사의 타깃이 됐다.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는 지난 14일 경남 KAI 사천 본사와 서울사무소를 압수수색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연합뉴스
올 상반기까지 카이에 대해 투자의견 ‘매수’ 일색이던 증권사들은 ‘중립’ 조정했다. 황어연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지난 9월 11일 “금감원 회계감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중립’ 의견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대표 방위사업체인 카이는 항공기 제조와 개발 등을 통해 최근 2년간 2조 9000억~3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최근 3년간 꾸준히 흑자를 냈으며, 법인세차감전 순이익도 3000억 원이 넘는다. 경쟁사인 한화테크윈이 지난해에야 법인세차감전 이익으로 전환하고, 불과 3년 전에는 1200억 원에 가까운 당기순손실을 냈던 것과 대조된다. 카이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회사 실적이 좋아 카이에 투자한 정·관계 인사가 시세 차익을 거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날개를 달았던 카이 주가는 하성용 전 대표가 경영 비리에 연루돼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곤두박질쳤다. 하 전 대표는 카이의 분식회계, 특혜 채용 등에 관여한 혐의(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지난 9월 23일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는 하 전 대표가 카이 협력업체를 차명 소유하고 부당 이득을 챙겼다는 의혹과 상품권을 허위 발행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정·관계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 등에 대해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카이에 대한 수사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오면서 방산업계에선 ‘카이 민영화’가 재개될지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이미 민영화가 시도된 카이는 박근혜 정부 때도 매각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카이 최대주주였던 산업은행은 공적자금 회수를 위한 자회사 매각 방침을 정했는데 카이의 경우 마땅한 인수 후보를 찾지 못해 민영화가 실현되지 못했다. 정부가 당시 염두에 둔 후보 가운데는 한화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월까지 카이 지분 19.02%로 최대주주였던 산업은행은 문재인 정부 들어 대부분 보유 주식을 수출입은행에 현물출자하고 경영에서 손을 뗐다. 현재 카이 최대주주는 지분 26.41%를 가진 수출입은행이다. 뒤를 이어 국민연금이 지분 8.04%를 보유하고 있다.
카이에 대한 검찰 수사 전까지 이 회사의 3대 주주는 지분 6%를 확보한 한화테크윈이었다. 그러나 지난 8월 16일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락(BlackRock Fund Advisors)이 카이 지분율을 6.5%로 끌어올리면서 한화테크윈은 4대 주주로 밀려났다. 한화는 “우선 검찰 수사와 금감원 회계감리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지분 추가 매입에 대해 신중론을 펴고 있다. 실제 재계 안팎에선 한화가 당장은 카이를 인수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16년 1월 한화는 보유 중인 카이 지분 10% 가운데 4%를 장외매도해 인수설을 잠재웠다. 업계 안팎에선 한화테크윈이 흑자 전환한 가운데 무리하게 카이를 인수했다가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특히 한화는 그룹 내부적으로 경영권 승계를 준비 중인데 지주사 지분 매입 등에 필요한 현금 확보가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막대한 현금이 동원될 카이 인수전에 선뜻 나서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카이 민영화를 반대한 바 있다. 카이 노조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에는 항공우주산업 육성과 항공 클러스트 조성이 포함돼 있다. 즉 민간이 아닌 정부 주도로 카이가 성장할 것이란 주장이다.
지난해 12월 최순실게이트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공동취재단
반면 카이가 궁극적으로는 한화의 품에 안길 것이란 견해도 적지 않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당시 한화가 카이 인수를 시도했지만 여윳돈이 없어 계약이 뒤로 밀린 것뿐”이라며 “방산 비리가 척결되면 그 과실이 (한화에)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한화시스템 등 한화 계열 방위사업체 3곳은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데, 방산 비리 수사와 무관하다는 말이 사정가 안팎에서 나온다.
카이 수사를 끝으로 당분간 방산 비리와 관련해 추가 수사는 없을 것이란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복수의 사정기관 관계자는 “방산 비리의 ‘몸통’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수사가 ‘윗선’으로 뻗어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한화는 비교적 최근까지 카이 이사회 핵심 일원으로서 검찰의 ‘타깃’이 될 여지가 있었지만 이를 비껴간 셈이다. 더구나 하 전 사장 구속으로 경영상 리스크가 해소된 것은 인수 측에 매력적인 요인이다. 주가 하락으로 인수가가 낮아진 것은 덤이다.
삼성과 ‘빅딜’로 국내 최대 방산업체로 급부상한 한화는 방산업계로부터 ‘한국의 록히드마틴’이 돼라는 주문을 받고 있다. 방산업계에 따르면 현재 한화는 세계 방산업체 가운데 30위권에 불과하지만 카이를 인수한다면 단번에 20위권 진입이 가능하다. 앞의 방산업계 관계자는 “적어도 10위권에 진입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주국방에 필요한 방위력 증강을 꾀하는 문재인 정부는 일찌감치 국방예산 증액을 공언한 상태다. 정부 지원이 확실시되는 사업을 마다할 기업은 없다. 시장 안팎에서 꾸준히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결단’을 부추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한화는 “입장을 밝힐 시점도 아니고, 결정된 것도 없다”며 인수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카이의 유동성에 문제가 생긴 것도 변수다. 지난 9월 21일 숨진 김인식 카이 부사장은 이라크로 날아가 카이가 납품한 3500억~4000억 원의 FA-50 수출 대금을 받으려 했지만 현지 사정 등으로 협상이 무산되자 크게 낙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카이 안팎에선 검찰 수사 장기화로 납품 대금을 받지 못하거나 해외 계약 건이 지연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푸념도 나온다. 카이 내부 관계자는 “항공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