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 김정운 교통 사고로 식물인간’
▲ 일본의 한 주간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재 반신불수 상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 ||
8월 후반의 어느날, 북한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수도 평양의 중구역에 있는 집무실에서 비서들로부터 9월 9일로 다가온 북한 정권 수립 60주년 식전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북한 정권 수립기념일, 즉 ‘9·9절’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과 함께 북한의 중요한 축일이다. 특히 60주년이 되는 올해의 ‘9·9절’에 맞춰 지난해부터 매제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책임자가 돼 평양시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또한 2만 명 이상의 인민군이 투입된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와 건국 60주년 역사를 그린 5만 명 시민과 학생들이 동원된 매스게임, ‘김정일화’ 전시회 등 60주년을 축하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8월 베이징 올림픽을 웃도는 행사로 만들라”는 김정일의 엄명이 있어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우호국의 국가원수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이렇듯 축하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집무실에 갑자기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평양에서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한다는 국가안전보위부의 최고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김정일에게 깊이 머리를 숙이며 보고를 했다.
“아드님에게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즉시 병원으로 옮겼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의식불명의 중태이십니다.”
‘아드님’이란 3명의 아들 중 김정일이 가장 아낀다는 막내 정운(25)이었다.
김정일에게는 여배우인 고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정남(37), 재일교포 출신의 무희 고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정철(27)과 막내 정운이 있다.
2001년까지 만 13년에 걸쳐 김정일의 전문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 에 따르면 김정일이 가족들과 식사를 할 경우 김정일의 옆자리인 ‘상석’은 막내인 정운의 자리로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장남인 정남은 첩의 자식인 데다가 해외생활이 길어 북한 내에 기반이 약했다. 차남인 정철에 대해서는 “계집애 같다”는 것이 김정일의 평가로, 후계자감은 아니었다.
두 형과 비교할 때 막내 정운은 한반도의 상징인 호랑이처럼 용맹한 성격으로 김정일이 “나와 비슷해서 남자답고 믿음직스럽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후지모토는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은 정운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일은 지금까지 아들들을 후계자로 하지 않고 자신이 죽으면 조선인민군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로 바꿀 생각이었다. 후계자로서 권력투쟁에서 살아남는 고통은 1974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회 총회에서 정치위원으로 선출된 이래 앞만 보고 아버지 김일성의 뒤를 걸어온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굳이 사랑하는 아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제왕학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운의 빠른 성장을 눈앞에 두고 역시 아들을 후계자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북한 주체력(主體歷)에서 2세기의 첫해(김일성 탄생 100주년)이자 자신도 고희를 맞는 2012년에 정운을 후계자로 내외에 발표할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실제로도 정운에게 후계자가 되는 제왕학 교육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벌어진 일이었다. 아버지와 닮아 스피드광인 정운은 애마인 고급 외제 자동차로 평양 시내를 질주하던 중 핸들 조작을 잘못해 차가 대파되는 사고를 일으킨 것이었다.
▲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평양 광장에서 북측 의장대가 환영 분열식을 하고 있다. 의장대 뒤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인다. | ||
김정일은 당뇨병과 간질환, 신장병, 심장병, 변비 등 다섯 개의 지병을 앓고 있다. 10년 정도 전부터 매 끼니 때마다 다섯 종류의 약을 복용하고 있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 사실상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쇼크로 인해 뇌졸중을 일으킨 것이었다.
김정일 일가에는 다섯 명의 의사와 세 명의 간호사로 구성된 전속 의료팀이 있지만 그들은 이 정도로 ‘큰 일’을 책임지고 진찰할 수 없다. 그래서 급히 측근들이 중국의 병원에 의사단 파견을 요청했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 프랑스나 독일 등의 일류 외과의들에게도 연락을 취해 당장 김 부자를 진찰하도록 요청했다.
결국 베이징의 인민해방군병원 소속인 여섯 명의 유능한 의사들이 평양에 파견됐다. 중국인 의사단은 즉시 김정일과 정운을 진찰했지만 정운은 이미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호흡을 계속해도 식물인간으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김정일의 치료에 전념하기로 했다. 김정일은 다행히 며칠 후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반신불수(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불명)가 되어 버렸다. 언어능력도 크게 떨어져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려면 적어도 몇 달의 재활기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중국인 의사단이 옆에 붙어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긴급사태를 맞아 9월 9일의 퍼레이드는 규모가 대폭 축소됐고, 정규군이 아닌 민병조직인 노농적위대가 열병식을 진행하게 됐다. 김정일의 대행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국회의장),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국방장관), 김영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네 명이 행사를 지켜봤다.
김정일의 부재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자 평양 중심부는 여든 살이 된 최고연장자인 김영남 위원장을 일단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로 서서히 변하고 있다. 그러나 김영남 위원장은 명목뿐으로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앞서 나온 조명록, 김일철, 김영춘과 같은 조선인민군 장로들이다.
북한에서는 헌법을 개정해 정식으로 김정일 체제로 바뀐 최근 10년 동안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인 김정일과 인민군 장로들의 긴장관계가 항상 계속되어 왔다. 김정일은 모든 일에서 군부를 우선하는 ‘선군정치’라는 이름으로 국내적으로는 보수파이고 대외적으로는 강경파인 군부에 크게 신경을 써왔다. 한 달 평균 여섯 번이나 군 시찰을 나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2000년 이후 개혁개방정책 하에 경제발전을 거듭하는 중국도 네 번이나 시찰을 한 김정일은 북한을 중국식으로 경제발전시키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또한 최대 위협인 미국이나 휴전선으로 반 세기 이상 대치해온 한국, 국교관계가 없는 일본과의 적대관계도 끝내고 싶어했다. 이런 김정일 정권의 내정과 외교의 걸림돌은 바로 기득권에 집착하는 군부였다.
금년 여름 북한을 둘러싸고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우선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유가 폭등과 고물가로 북한 경제는 이미 붕괴를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에 김정일은 군 간부들을 한 자리에 모아 중요한 훈시를 했다. 김정일은 군의 기득권을 전혀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국내적으로는 중국식 개혁개방정책을 받아들일 것과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할 것을 납득시켰다. 이런 포석을 깐 후에 정운에게 서서히 권력이 옮겨가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김정일의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본인과 후계자가 동시에 정치생명이 끝나면서 남은 것은 보수적이며 강경한 군부였다.
8월 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할 것을 예정했던 미국은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서의 검증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약속을 뒤집었다(미국은 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편집자 주). 군부는 그 보복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김정일의 승낙도 받지 않고 8월 26일부터 핵개발을 재개했다. 군부가 김정일의 허락 없이 ‘폭주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다.
곧이어 군부는 김정일이 사망한 후 가장 걸림돌이 될 장남 정남을 9월 11일에 중국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당신이 출국하면 (김정일) 장군님이 무사하다고 세상이 판단할 것”이라고 적당한 이유를 꾸며댔다. 앞으로 김정일 패밀리는 차례로 제거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군부는 미국에 대한 두 번째 복수를 준비 중이다. 사정거리 6700㎞의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실험을 태평양을 향해 실시하는 것이다(10월 7일 오후 서해상에 단거리 미사일이 발사됐다-편집자 주). 평양북도 철산군 동창리에 건설된 장거리 미사일 발사대에는 엔진에 연료를 실을 준비를 하고 있다(이 사실은 미국 정탐위성도 파악하고 있다).
2년 만인 이번 실험은 미국 알래스카까지 사정거리에 넣은 미사일을 발사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미국 부시 정권을 위협하려는 목적이다. 이번 대포동 2호 미사일은 1998년에 실시한 대포동 1호 발사 실험과 마찬가지로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나간다. 일본 측은 만에 하나 도중에 궤도를 벗어나 일본을 직격할 위험성을 우려하고 있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