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볼세라 생쥐처럼 ‘샤삭’
지난 가을 무렵부터 월가의 상류층 안주인 고객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쇼핑 트렌드는 다름 아닌 ‘시크릿 쇼핑’이다. 말 그대로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쇼핑’인 것이다.
리먼브러더스의 최고 경영자인 딕 풀드의 아내 캐슬린 풀드의 경우를 보자.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맨해튼에 위치한 ‘에르메스’ 매장을 찾는 그녀는 이곳의 대표적인 단골 손님 가운데 한 명이다. 보통 한번 올 때마다 적게는 5000달러(약 660만 원)에서 많게는 1만 달러(약 1300만 원)까지 뿌리고 간다.
얼마 전에도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 이날 개당 2225달러(약 300만 원)하는 스카프 세 장을 구입한 그녀는 계산을 하면서 매장 직원에게 ‘특별한 주문’을 했다. “아무런 글씨나 무늬도 없는 흰색 쇼핑백에 담아 주세요.”
그녀가 ‘에르메스’ 특유의 오렌지색 쇼핑백을 거부한 까닭은 무엇일까. ‘에르메스’의 시그니처 컬러인 오렌지색 쇼핑백은 누구나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는 일종의 ‘과시용’인데 말이다.
그녀가 이렇게 겸손(?)해진 데는 이유가 있다. 파산한 회사의 안주인이 이렇게 돈을 펑펑 쓰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면 좋을 것 하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쇼핑을 마치면 오렌지색 쇼핑백을 들고 자랑스럽게 문을 나섰지만 이제는 쇼핑백을 꽁꽁 숨겨야 하는 등 상황이 정반대가 되고 만 것이다.
‘에르메스’의 판매 담당 직원은 “이처럼 ‘쇼핑백 바꾸기’는 월가의 상류층 고객들 사이에서 이미 흔한 일이 됐다”고 말했다. 손님이 원하면 으레 준비해둔 흰색 쇼핑백을 꺼내 물건을 담아주는 것이 관례처럼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명품 매장의 매니저는 “지난해 8월부터 이런 트렌드가 시작됐다. 그때만 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하루에 두 번 정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명품 및 고급 서비스에 대한 시장조사를 하는 ‘럭셔리 인스티튜트’사의 밀튼 페드라자 회장은 “금융위기가 도래한 후 월가의 상류층에서는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갑작스런 위기에 혼동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당당하게 벌어서 쓰는 것인 데도 불구하고 마치 돈을 쓰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들의 죄책감으로 인해 야기된 또 하나의 트렌드는 ‘쇼핑 대행업’이다. 자신이 직접 쇼핑을 하러 나가는 대신 비서나 대행업체를 시켜서 쇼핑을 해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역시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색 쇼핑백에 담아 오는 것이다. 또한 이런 고객들 가운데에는 남편 몰래 신용카드 영수증을 조작하는 경우도 많다. 남편이나 다른 가족들로부터 사치를 한다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다.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서 상류층 고객들을 상대로 ‘쇼핑 대행 서비스’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루시 앤 배리는 “지난 금융위기 후 고객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한 여성 고객이 ‘구찌’ 매장에서 1200달러(약 158만 원) 짜리 핸드백을 대신 구매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리고는 “보낼 때 꼭 ‘생일축하 카드’를 동봉해서 보내주세요. 안 그러면 남편이 죽이려 들지도 몰라요”라고 덧붙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인 양 속이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여성 고객은 ‘에르메스’에서 물건을 구매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신용카드를 세 개로 나누어서 결제해주세요”라고 주문했다. 어마어마한 가격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밖에도 반은 현금으로, 또 반은 신용카드로 결제하거나 혹은 일부는 선불로 계산하고 나머지는 후불로 계산하는 등 은밀한 쇼핑 방법도 생겨났다.
이처럼 상류층 마나님들의 쇼핑 패턴까지 바꿔 놓았을 정도로 이번 금융위기의 여파는 사회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듯 보인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