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수사·압수수색으로 뒤숭숭…내부선 “정권교체기마다 겪는 홍역” 주장
지난 9월 12일 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앞에서 KB금융노동조합협의회 조합원들이 윤종규 회장 연임 찬반 설문조작 규탄 및 후보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월 31일 오후,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에 투기자본감시센터 관계자가 들어섰다. 윤종규 KB금융 회장을 횡령·배임 혐의로 고발한 투기자본감시센터에 대한 고발인 조사가 이날 시작됐기 때문이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윤 회장과 KB금융 등이 2014년 말 손해보험업계 4위권이던 LIG손해보험을 고가에 사들여 총 5451억 원 규모의 횡령·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이와 관련해 윤 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고발한 상태다. 특정경제가중처벌법은 형법상 횡령·배임죄에 비해 형량이 매우 무겁다.
금융권에서는 이번 검찰의 고발인 조사를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발장이 접수된 지 4개월이 훌쩍 넘은 사건을 뒤늦게 들여다보는 것은 통상적인 수사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은 내부적으로 고소·고발이 있은 날부터 ‘3개월 이내’에 수사를 종결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운영하고 있다. 또 고소·고발 즉시 고소·고발인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투기자본감시센터가 윤 회장을 고발한 날짜는 지난 7월 4일. 3개월 이내 종결은커녕 4개월이 지난 시점에 고발인 조사가 시작된 셈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다른 업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금융권 사건의 경우 고발장이 접수되면 일주일 안에 고발인 조사가 이뤄지고 수사도 속전속결로 진행돼 왔다”며 “넉 달이나 지나서 갑자기 고발인을 부르는 사례는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게다가 이번 고발 건은 사실상 지난해 한 차례 다뤄져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진 사안이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지난해 6월과 8월에 KB금융의 LIG손보 및 현대증권 지분 고가 인수, 그리고 KB금융이 현대증권에게 자사주 저가 매도를 강요해 경영권 프리미엄을 횡령했다는 이유 등으로 두 차례 검찰 고발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검찰은 두 건 모두 ‘혐의 없음’을 사유로 각하 처리한 바 있다.
검찰 조사가 시작된 지 사흘 뒤인 지난 3일에는 더 큰 일이 벌어졌다. 이날 영등포경찰서는 갑자기 국민은행 여의도 본점에 들이닥쳐 HR(인사담당)본부장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날 압수수색은 KB금융 노동조합협의회가 지난 9월 조합원들에게 윤 회장의 연임 찬반을 물어봤던 온라인 설문조사에 회사가 개입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윤 회장을 경찰에 고소한 데 따른 것이다.
KB금융 노조협의회는 지난 9월 13일 사측이 회장 연임 찬반 설문조사 결과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윤 회장과 HR본부장을 업무방해 및 부당노동행위 등 혐의로 고소했다. 이번 경찰수사와 관련해 KB금융은 노조협의회의 설문조사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공동조사를 제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조협의회 관계자는 “회사에서 공동조사를 제의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금융권은 HR본부 사무실에서 압수된 하드디스크 등의 분석 결과에 따라 윤 회장이 소환조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검·경의 움직임이 10월 있었던 금융노조의 대통령 면담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는다. 지난 10월 24일 청와대에서는 노동계 초청 행사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허권 금융노조 위원장이 참석했다.
금융권 소식통에 따르면 이날 허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윤종규 KB금융 회장의 ‘셀프 연임(본인의 연임을 스스로 결정)’ 문제를 거론했으며 “정부가 관심을 갖고 합당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해당 부처가 관련 내용을 살펴보고 필요하면 대응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날의 대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청와대 회동이 있은 지 불과 일주일여 후부터 검찰과 경찰이 갑자기 윤종규 회장과 KB금융 관련 사안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각에서는 윤 회장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금융권 CEO(최고경영자)들이 줄줄이 낙마하거나 스스로 물러나며 물갈이되는 현상과 맞물려 용퇴설까지 조심스럽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물론 윤 회장이 당장 연임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셀프연임’ 논란에도 불구하고 윤 회장의 연임은 KB금융 주주들이 결정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KB금융은 오는 20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윤 회장의 연임을 비롯한 안건 4개를 의결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가 강하게 불어닥치고 있는 ‘외풍’을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금융권 CEO 중에서 김용환 NH농협금융 회장과 이광구 우리은행장이 윤 회장과 함께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있는데, 이광구 행장은 이미 사퇴의사를 밝힌 상태다.
금융권에서는 이 사안이 오비이락이 아니라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일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정권이 바뀌면서 물갈이 인사와 ‘자리 챙겨주기’가 필요한 시점에 때마침 금융노조가 명분을 제공했다는 시각이다. 금융은 여전히 관치의 힘이 강한 산업인 데다 낙하산 인사가 연례행사처럼 횡행하는 곳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일은 윤 회장을 향한 정치권과 관료사회의 무언의 압박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 한 고위 관계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돼 왔던 일”이라면서 “대놓고 물러나라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눈치를 주고, 그게 안 통하면 사정당국을 동원해 망신을 주고, 그래도 안 되면 범죄자로 몰아 강제로 내쫓는 수순이 공식처럼 통용돼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일도 윤 회장을 향한 정부의 시그널인지, 아니면 단순 길들이기 차원인지 여부를 잘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