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교체 주기 2년으로 짧게 설정…예민한 사안은 구두 보고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원가 부풀리기와 하성용 대표의 횡령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경기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KAI 협력업체 T 사를 압수수색, 압수품을 가져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시작이 반이다’라는 격언 이상으로, 압수수색이 수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어마어마하다. 압수수색을 얼마만큼 꼼꼼하게 했느냐는 수사 전체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정도다. 검찰 내사 사실을 모르는 범죄 혐의 관련자들이 소지하고 있던 각종 문서 및 기록, 휴대폰 속 문자 메시지와 통화 기록, 카카오톡 포함 SNS 메시지와 사진 등 다양한 범죄 관련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이때 핵심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 향후 재판까지 가는 과정에서 피의자들이 혐의를 부인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럴 경우 구속은 물론, 재판까지 다툼의 여지가 있다.
때문에 검찰은 압수수색 전, 만반의 준비를 한다. 횡령·배임 혐의로 대기업을 압수수색할 경우 더욱 철저하게 진행한다. 본사 외에 계열사 및 관련 회사들을 어디까지 압수수색할지, 어느 부서의 누구 PC를 압수수색할지, 해당 사무실이 몇 층인지, PC에서 확보할 자료의 성격과 내용, 몇 년치 회계자료 등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압수수색을 개시한다. 아침 9시에 딱 맞춰 해당 기업에 들이닥치면서 시작되는 압수수색이 길면 자정이 넘어서 끝날 때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임원급 핵심 관계자들의 사무실, 자택은 더욱 철저하게 턴다. 은밀한 내용이 담긴 비밀 수첩이나 문건을 찾아내면, 수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많이 봤을 법한 내용들인데, 실제로 이런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진 적도 있다. 내부 고발자의 제보로 내사를 마친 검찰은 전격적으로 한 대기업 회장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자신만만해 하는 회장 앞에서 숨겨져 있던 비밀 금고를 찾아낸 뒤 보기 좋게 열어버린 것. 해당 대기업 회장이 검찰 조사에서 순순히 죄를 인정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삼성, 현대차, 롯데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오너 일가들이 한 차례씩 검찰 조사를 다 받아봐서일까. 두 번 당하지 않겠다며 검찰 수사에 철저하게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압수수색에 대비하는 요령도 생겼다. 증거를 주지 않겠다는 것. ‘증거’가 없으면 윗선(회장님)의 지시나 관여 여부를 인정하지 않는 기업 임원들 특유의 진술 태도까지 어우러지면서, 대기업 수사가 난항은 불가피해졌다는 설명이다.
“기업 수사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정말 힘들어졌습니다. 증거를 은닉했다고 할 수 없게끔 다 없애놨더라고요.” (검찰 관계자)
최근 1년 사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서 근무하며, 여러 대기업을 수사했던 한 검사의 푸념이다. 대기업들을 향한 수사를 쉬지 않고 했던 그는 “앞으로 대기업 수사는 더 힘들어질 것”이라며 “수사에 대비하는 기업들의 준비가 정말 놀랄 정도”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해 대대적으로 수사를 받았던 한 기업을 예로 들었다. B 사는 회장에게 가는 보고서는 아예 별도로 만들 정도로 임원·실무진 간 소통이 다르게 이뤄지던 곳이었는데, 그중 회장에게 보고가 이뤄지는 문서들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카네(일본어로 돈)’나 ‘회장님’과 같은 단어들이 들어간 문서는 특정 기간이 지나면 저절로 삭제되도록 컴퓨터 프로그램이 세팅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예민한 내용들이 포함됐으면, 자료를 없애 향후 수사 때 증거가 될 여지를 차단했다는 설명인데, 그는 “문제의 소지가 있을 부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수사하는 데 정말 애를 많이 먹었다”고 털어놨다.
중요한 자료가 만들어지는 핵심 임직원들의 PC 역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해킹 등 보안을 이유로 설정된 보안의 날 등을 기점으로 삼아, 중요한 자료를 꾸준히 삭제한다는 것. 일정 기간이 지난 자료는 이때 다 사라진다. 통상 수년간의 자료를 확보해 ‘달라진 점’을 찾아내 범죄를 입증해야 하는 검찰 입장에서는 핵심 증거 자료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 같은 대비책은 일반적으로 다른 기업들도 비슷한데, 특히 검찰 수사 등이 거론되면 멀쩡하던 PC를 교체해 버리기도 한다.
이때 PC는 단순히 교체하는 수준이 아니다. 사용했던 PC의 하드 디스크를 디가우징(자기장으로 하드디스크를 물리적으로 훼손하는 방법, Degaussing) 시킨다. 단순 삭제(Delete)의 경우 하드 디스크를 복원해 대부분의 자료를 살릴 수 있지만, 디가우징을 선택하면 복원이 불가능하다. 망치로 부수는 방법도 있지만, 대기업들은 업체를 써서 PC를 디가우징 시켜버린다. 원천적으로 자료를 없애 버리는 셈인데, 증거 은닉 논란을 피하기 위해 회사 규정 등을 통해 PC 교체 기간도 2년 정도로 짧게 설정한다고 한다. 증거 은닉 혐의를 적용할 소지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다른 대기업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 지난해 검찰 수사 가능성이 거론됐던 대기업 C 사는 검찰 수사에 앞서 공정위 조사가 시작되자, 문제가 될 수 있는 PC 내 내부 회계 기록들을 모두 삭제했다. 이는 해당 기업 윗선의 비공식적인 지시로 이뤄졌지만, 검찰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향후 수사를 하더라도 진술 외에는 해당 기업의 불투명한 자금 거래를 찾아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있는 기록을 삭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다소 예민한 사안에 대해서는 구두로만 보고하고, 문서 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내용만 남기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 지난 몇 년 동안 검찰 수사를 여러 차례 받았던 금융 공기업 D 사 관계자는 “회장에게 보고하는 내용 중 조금이라도 예민한 부분이 있으면, 먼저 구두로 보고해서 확인을 받더라도, 이를 서버 상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며 “결재가 필요한 경우 예민한 부분을 제외한 형식으로 문건을 만들어서 허락 받은 뒤, 서버에 올려 결재를 받는다”고 털어놨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런 식으로 증거를 없애버리면 검찰에게 남은 것은 ‘진술’밖에 없어지는데, 문제는 진술도 갈수록 받아내기 힘들어졌다. 오랜 기간 회사에 충성한 임원들이 많을수록 검찰보다는 ‘오너 일가’를 위한 진술을 털어놓기 때문. 지난해 서울중앙지검 롯데수사팀 수사 당시 신동빈 회장 등 오너일가를 비롯 롯데그룹의 은밀한 의사 결정 과정에 깊숙히 관여했던 이인원 롯데 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람에, 수사에 적지 않은 애를 먹었다고 한다.
대형로펌도 대기업 수사를 막는 방법을 영업으로 활용하며 부추긴다. 대형 로펌들은 ‘자문’을 이유로 검찰 수사에 대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이때 모두 ‘증거를 남기지 말라’고 입을 모아 주문한다. 익명을 요구한 변호사는 “검사로 근무할 때는 이렇게 증거 자료들을 없애는 기업들을 보면 화가 났는데, 변호사가 되니 불법적이지 않은 선에서 그런 조언을 할 수밖에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정도가 심한 몇몇 대형 로펌은 검찰이 내사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해당 기업들을 찾아가서 ‘선임하면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검찰 압수수색 전 PC 일괄교체 등을 노하우라며 전해주곤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
교묘해지는 정경유착 “의원님, 잘 부탁합니다” 유권자들에 선물 살포 검찰 특수 수사의 또 다른 영역인 정치인과 기업인 간 청탁 부분도 더 교묘해졌다. 기업에서 정치인에게 돈을 줄 때 과거에는 사과 박스나 007가방에 돈을 넣어서 차 등에서 전달했다면, 이제는 직접 뇌물에 해당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 협회 후원금으로 내거나 유권자들에게 ‘물품’을 뿌리는 형식이 대표적이다. [eoimage=서울] 박은숙 기자 =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이 6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출석해 물을 마시고 있다. 2017.11.06 실제 최근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도 이와 같은 케이스다. 기업의 로비를 받고, 협회로 뇌물성 후원금을 받았다는 게 검찰의 판단.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신봉수 부장검사)는 롯데홈쇼핑이 사업권 재인가를 받기 위해 국회 미래방통위 소속 전병헌 당시 국회의원이 협회장으로 있던 e스포츠협회에 3억 원의 후원금을 낸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전 수석은 “불법은 없었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검찰은 이미 “전 의원을 만난 뒤, 전 의원 비서관 등에게 후원금을 건넸다”는 롯데홈쇼핑 측 진술을 확보했고 전 수석을 소환 조사하는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좋게 보면 기업들과 정치인들이 과거에 비해 더 조심하고 있고, 그래서 깨끗해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바뀌어가는 범죄 유형을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을 계속 정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