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이 아닌 ‘파트너’로 환대
▲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월 제 44대 대통령 취임식 후 부시 전 대통령을 배웅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현존하는 미국의 전임 대통령들은 지미 카터(85), 조지 H W 부시(85), 빌 클린턴(63), 조지 W 부시(63) 등 모두 네 명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말처럼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과의 관계는 ‘적’이라기보다는 ‘조언자’나 ‘후원자’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비록 정치 성향이나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다 할지라도 일단 전임자는 백악관을 떠나면 정치에서 손을 뗀 채 뒤로 깨끗이 물러나고, 후임자는 전임자에 대한 최대의 예의를 갖추고 공격하지 않는 게 관례다. 더 나아가 전임 대통령을 아직도 싸워야 하는, 혹은 제거해야 하는 위험한 존재로 여기거나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는 과거의 정책을 비난하거나 뒤엎는 일도 드물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이런 배려는 현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과거 정부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전 정부의 잘못을 비난은 하되 부시 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는 것이다. 바로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정치적 관례인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때문이다.
미국의 오래된 정치적 전통 가운데 하나는 가급적 전현직 대통령이 직접 맞붙거나 서로를 공개 비난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다. 선거 때에는 아무리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려도 일단 당락이 결정되고 백악관 주인이 확정되면 떠나는 자와 들어오는 자는 서로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게 일반적이다. 다시 말해 전임자가 후임자의 정책이나 방향에 대해 나서서 비난하거나 반대로 후임자가 전임자의 과거 업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비판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금기시되어 있다.
가까운 예로 지난 1992년 공화당의 부시와 민주당의 클린턴은 선거 당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어느 나라 선거가 그렇듯 흑색선전이 난무했고, 서로를 헐뜯고 손가락질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지금 둘의 모습은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 이제는 ‘퇴임 대통령’이라는 동질감이 더 느껴지는지 강연이나 기념회 등을 이유로 함께 세계여행을 다니고 있으며, 필요할 때면 기꺼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게다가 둘 다 골프 마니아인 까닭에 함께 골프 라운딩을 나가는 모습도 종종 목격되고 있다.
이렇게 전임자와 나란히 골프를 즐기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 미국 대통령들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제럴드 포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에 대해 다소 파격적인 예우를 갖췄다. 국민과 참모들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취임한 지 한 달여 만에 결국 닉슨을 사면해버린 것이다. “이제 미국의 어두운 과거는 묻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전임자에 대한 예우는 오히려 본인의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는 득보다는 실이 돼버렸다.
38대 대통령인 포드와 그의 후임자 카터의 우정은 퇴임 대통령들 사이에서 흔치 않은 매우 특별한 사례다. 소속 정당마저 다른 이들의 우정을 워싱턴 정가에서는 정쟁을 떠난 ‘진정한 우정’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의 각별한 우정은 이미 카터의 백악관 재임 시절부터 시작됐으며, 퇴임 후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카터는 백악관에서도 수시로 포드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업무에 대해 조언을 구했으며, 포드도 전임자로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2006년 포드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추도사를 낭독하기도 했던 카터는 2008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맨 프롬 플레인스(Man From Plains)>에서 “여행의 끝에서 나와 포드는 미국 전직 대통령 역사상 가장 친한 친구가 돼있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전임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집권 정당이 바뀌는 경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로 부시는 취임 초기 클린턴 정부의 정책을 거의 대부분 비난하고 뒤집어 버려서 한때 ‘ABC (Anything But Clinton)’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때에도 부시는 클린턴 행정부와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했지만 클린턴 개인을 향한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즉 전임자에 대한 예우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오바마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큰 정치적인 쟁점은 부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청산하고 관련자를 처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이다. 이라크 군대 철수,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테러범 고문 기법의 잔혹성 여부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바마는 부시를 향해 ‘네 탓이다’라는 일방적인 공방은 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가진 케이블 방송 C-SPAN과의 인터뷰에서도 오바마는 “부시 전 대통령과 연락하고 있나”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아직 취임한 지 4개월밖에 안 됐지만 전 대통령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 정부는 그동안 국민들 뜻에 반하는 결정을 많이 내려왔다”며 부시 정부를 비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왼쪽부터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버락 오바마, 조지 워커 부시, 빌 클린턴, 지미 카터. | ||
요즘 추세로 보면 전직 대통령들이 정치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통은 회고록을 집필하거나 강연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부시의 경우 현재 고향인 텍사스에 머물면서 회고록 <결정의 순간들>을 집필 중이며, 평소 좋아하던 산악자전거를 타면서 운동을 하거나 강연을 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퇴임 후 최초로 회고록을 작성해서 돈을 번 대통령은 트루먼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미주리주로 돌아왔을 당시 그는 빈털터리 신세나 다름없었다. 당시만 해도 퇴임 대통령에 대한 연금이 지급되지 않던 때라 그가 벌어들이는 수입이라곤 군인 연금으로 받는 월 112달러(약 14만 원)가 전부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책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었고, 그는 67만 달러(약 8억 5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두 권짜리 회고록을 출판했다.
지금까지 회고록을 출간해서 가장 재미를 본 사람은 클린턴이다. 비록 르윈스키 스캔들로 재임 시절 흠집이 생겼지만 지금은 강연과 회고록 집필 등으로 돈방석에 앉았다. 현재 그의 강연료는 회당 25만 달러(약 3억 2000만 원)로 ‘고액 강연전문 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2007년 강연으로 벌어들인 돈만 무려 4000만 달러(약 5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회고록 <마이 라이프>로 1500만 달러(약 200억 원)를 벌어들이는 등 퇴임 후 현재까지 클린턴의 주머니는 1억 900만 달러(약 1400억 원) 정도 더 불어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와 달리 카터는 사회사업가와 국제인권운동가로 전향해 빛을 보고 있다. 비록 재임 시절에는 무능한 대통령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퇴임 후에 더욱더 존경을 받고 있다. 또한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글을 올리면서 누리꾼들과 소통하는 창구를 마련하는 등 온라인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귀가 따갑도록 한 말이 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어떤 예우를 어떻게 했는지 우리네 전직 대통령은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