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향한 발포 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경무관...37년만에 흉상 제막식, 문재인 정부는 치안감 특진으로 화답
[일요신문]
“도청을 접수하라!”
“못합니다. 그곳에는 시민들의 형제도, 가족도, 이웃도 있습니다. 경찰이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치안을 맡고 있는 책임자야? 그러고도 당신이 경찰이야?”
“...”
1980년 5월 25일 광주 전투교육사령부에선 두 사람이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신군부에 대항해 광주에서 5.18혁명이 일어나고 전남도청은 시민군에 의해 장악됐습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신군부 계엄군의 공수부대 역시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사령부에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과 김종환 내무부 장관이 방문했고, 그 자리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그리고 이 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안병하 전남 경찰경무관이 대치중이었습니다.
이희성 사령관은 안병하 경찰경무관에 시민군 진압을 위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렸고, 이에 안병하 경무관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던 것이죠. 그 서슬파란 계엄군의 현실 권력 앞에서도 안병하 경무관은 목숨을 걸고 자신만의 ‘원칙’을 지킵니다.
그 원칙이 뭐냐고요? 경찰 안병하의 원칙은 ‘시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광주에서 5.18 혁명이 발생했을 당시 ‘시위 진압’을 주목적으로 했던 기동대에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안전수칙을 잘 지켜라”
“학교 안으로는 진입하지 말라“
“시위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잡혀온 시민들에게도 식사를 정상적으로 지급하고 가혹행위하지 마라”
신군부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5.18 혁명은 곧 진압됐지만, 신군부의 보안사령부는 안 경무관을 서울로 연행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혹독한 고문’ 뿐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은 신군부 소굴이었고, 경찰 내부에서 조차 그를 편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안병하 경무관은 모진 고문 끝에 이러한 ‘조건’을 걸고 사표를 제출합니다.
“절대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마시오!”
경찰 안병하는 모진 신체적․정신적 고문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는 후유증을 겪다 고혈압과 당뇨, 담낭염, 신부전증 등 지병을 안고 1988년 10월 10일 쓸쓸하게 눈을 감습니다.
안병하 경무관의 가족들은 가장의 죽음으로 살던 집까지 내놓고 혹독한 생활고를 겪었지만, 그 보다 더 큰 아픔은 ‘무능한 경찰’ ‘배신자’ 라는 ‘불명예’와 ‘낙인’이었습니다. 훗날 신군부의 수장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그를 ‘무능한 경찰’로 회자하기까지 했죠.
물론 혹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건 안병하 경무관이 상부의 명령을 어긴 것은 사실이 아닌가?”
아니면...
“혹시 나약한 정신력 때문에 명령 이행을 거부한 것 아닌가?”
정말 그럴까요?
절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 정반대죠. 경찰 안병하 경무관은 육군사관학교(7기)를 졸업한 군인 출신입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참전 장교였습니다.
그는 특히 전쟁 초기, 방어전이었던 춘천-홍천 전투에서 톡톡한 전과를 올립니다. 적진의 총알 밭에서 나침반 하나와 무전병을 이끌고 침투했고, 적진의 정확한 장소를 아군에게 알렸죠. 그는 목숨을 내놓고 조국을 위해 싸웠던 군인이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화랑무공훈장까지 받게 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1962년 군 간부 특채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안 경무관은 1968년 제주 서귀포에 간첩이 침투하자 직접 경찰들을 지휘하며 북한군 12명을 사살, 2명을 생포하고 간첩선까지 나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때 그는 중앙정보부로부터 표창까지 받게 됩니다.
이렇듯 안병하 경무관은 절대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조국과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나설 정도로 담대했고 용감했던 사람이었죠.
안병하 경무관의 명예회복은 그가 죽은 뒤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 중’입니다.
유가족들은 그가 순직한 뒤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군사정권 시절 경찰과 시 당국은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안병하 경무관의 부인인 전임순 여사는 그의 순직 이후 시시때때로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습니다.
문민정부 시절이 되어서야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고,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그는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 및 순직 경찰로 인정받아 국립서울현충원 경찰묘지에 안장됐습니다.
하지만 지난 보수 정권 동안 그에 대한 재평가는 다소 지지부진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러한 지적을 받고 5.18 기념식에서 그에 대한 재평가를 약속했습니다.
지난 11월 22일 전남지방경찰청 로비에선 뜻 깊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병하 경무관의 추모흉상 제막식이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지난 11월 27일 안 경무관의 1계급 특진 추서를 내려 자신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늘에서 ‘치안감’ 특진 추서를 받게된 안병하 경무관...그의 유족 중 셋째 아들인 안호재 씨는 제막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경찰도 이제는 완전한 정부의 독립기관으로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는 면모를 보여달라. 그래야만 저희 같은 역사의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님은 죽을 때까지 강제해직 되신 분들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37년 전 아버님이 못 다한 위민정신을 경찰이 펼쳐 달라“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