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 지나고 블랙홀 오는 느낌, 단장 퇴진 희망한다”
28일 LG 트윈스 사무실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팬들의 시위.
[일요신문] 서울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은 계절에 따라 분위기 차이가 큽니다. 플레이오프 일정까지 마무리된 시점, 야구가 없는 늦은 가을에는 잠실야구장 일대가 한산합니다. 하루에도 막대풍선 수백개가 팔려 나가는 종합운동장역사 내 응원용품 판매점도 이른 저녁시간 문을 닫습니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11월임에도 잠실야구장에서 응원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최근 LG 트윈스 선수단 재편성 결과에 불만을 품은 팬들이 구단 사무실 앞에서 항의 시위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LG는 최근 연이어 베테랑 선수들을 내보내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난 11월 22일은 2차 드래프트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오전, 본격적인 2차 드래프트가 진행되기도 전에 LG로부터 방출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내야수 정성훈의 방출. 이어진 2차 드래프트에서는 외야수 이병규와 백창수, 투수 유원상, 내야수 손주인이 40인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돼 다른 팀에 지명됐습니다. 하루만에 5명의 선수가 LG에서 다른 팀 유니폼을 입게 된 것입니다.
특히 이 중 정성훈과 손주인의 이탈은 팬심을 들끓게 했습니다. 정성훈은 지난 2009년 LG와 FA 계약을 맺으며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는데요. 이후 2번의 FA 계약에 성공하며 9년간 간판 내야수로 활약했습니다. 손주인은 지난 2012년 트레이드로 LG에 입단했습니다. 이전까지 백업 선수에 머물렀던 그는 LG에서 주축 선수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주말 LG 구단 사무실 앞 상황.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2차 드래프트 이틀 뒤인 24일, 잠실 운동장내 LG 사무실 앞에는 때 아닌 ‘유광잠바’가 나타났습니다. 정성훈 방출과 2차 드래프트 결과에 분개한 팬이 1인 시위에 나섰습니다. 시위에 동조하는 팬들도 생겼습니다. 주말엔 100여명의 팬들이 현장을 다녀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일요신문i>가 잠실야구장을 찾은 지난 11월 28일에도 10여명의 팬들이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1인 시위를 시작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현장을 지키고 있는 표 아무개 씨(스스로 팬 커뮤니티 닉네임인 ‘강동LG맨’으로 불리길 원했습니다)는 “정성훈 선수와 손주인 선수가 팀을 나가게 된 것을 보고 나서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와 현장에 있는 팬들이 주장하는 바는 ‘양상문 단장 퇴진’이었습니다. 그는 “올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며 양 단장은 감독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단장이 됐다. 단장 자리에 올라 처음 한 일이 정성훈 방출이다”라며 “그동안 참아왔던 팬들 마음에 불씨를 지핀 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시위 현장에서는 오프라인 서명운동도 펼쳐지고 있다.
‘강동LG맨’은 이전까지는 양상문 단장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양 단장이 감독을 하는 지난 3년간 일부 선수만 편애하는 듯 한 기용을 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였다. 그래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전까지 이렇게 해본 적이 없다. 작년에 이병규 선수를 놓고 팬들이 반발 할 때도 나는 참았다. 그런데 단장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베테랑 선수 방출이다. 집에 있던 양 단장 감독 시절 받은 싸인볼도 버렸다.”
그는 정성훈, 손주인 선수 등의 방출 소식을 접하고 팬 커뮤니티에서 자체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어떤 조치가 취해지면 LG를 응원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압도적 수의 팬들이 ‘대형 FA 영입’보다도 ‘양 단장 OUT’을 원했다고 합니다.
시위 현장에서 손주인 선수를 가장 좋아한다는 팬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답답한 심정이다. 암흑기가 지나가니 블랙홀이 오는 느낌이다. 이런 체제에서 어떻게 우승을 논할 수 있겠나. 정성훈과 손주인 둘 다 LG에서 은퇴하고 싶어 하던 선수들이다. 팀에 기여해온 선수들을 이렇게 내치는데 장차 프랜차이즈 스타로 꼽히는 오지환 같은 선수들이 박용택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팀에 남아 줄지 모르겠다. 떠난다 해도 우리가 할 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식당을 운영하는 손 선수 어머니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등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현장에 있는 구단 프런트에 대한 불만도 터뜨렸습니다. 이들은 “6일째 같은 자리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지만 구단으로부터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시위를 처음 시작한 표 씨는 “오는 목·금요일(11월 30일, 12월 1일)에는 LG 그룹 본사가 있는 여의도 쌍둥이 빌딩 앞에 나가겠다”고도 했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부를 수 없게 된 응원가에 대한 후속조치가 원만하지 않다는 지적도 덧붙였습니다.
#‘방출 선수’ 정성훈·손주인의 시즌 기록은
정성훈 선수는 올해 276타수 86안타 6홈런 타율 0.312를 기록했습니다. 팀의 1루수이자 지명타자로 경기에 나섰고 다소 하락세는 있었지만 올해 38세의 나이를 감안하면 준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손주인 선수는 294타수 82안타 5홈런 타율 0.279를 기록했습니다. 2군에 내려가기도 했지만 시즌 중 2루수 자리에 가장 많이 서며 팀내 경쟁 우위에 섰습니다.
LG 유니폼을 입은 정성훈. 연합뉴스
이들의 방출에는 세대교체라는 명목이 붙었습니다. 구단에서는 정성훈 선수 방출에 대해 “기존 자원이 많아 출전 기회를 줄 수 없을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타자의 능력을 판단할 때 많이 참고되는 지표인 OPS(장타율+출루율)을 살펴보면 정성훈 선수는 젊은 선수들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정 선수는 팀 내에서 올시즌 60경기 이상 나선 타자 중 박용택 선수에 이어 OPS 2위(0.828)를 차지했습니다. 오히려 후배들을 앞서는 기록입니다. WAR는 1.57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많은 승리에 기여했는가를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1루 포지션에서만큼은 팀 내 경쟁자가 없는 기록입니다.
정성훈 선수가 나이가 많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생으로 동갑인 NC 다이노스 외야수 이종욱 선수는 올 시즌을 마친 현재 NC와 재계약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그도 정성훈 선수와 크게 차이가 없는 OPS 0.774, WAR 1.55를 기록했습니다.
손주인 선수는 OPS 0.703, WAR 0.77을 기록했습니다.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이 역시 LG 2루수 중 최고 기록입니다. 그는 2차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김한수 삼성 감독은 구단에 손주인 선수의 지명을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전해졌습니다.
정성훈, 손주인 선수의 방출은 LG팬들의 불만을 폭발 시켰습니다. 이들은 144경기가 치러지는 정규 시즌에서 나란히 115경기에 나섰습니다. LG 타자들 중 박용택, 양석환, 이형종, 유강남 선수에 이어 5위 기록입니다. 아직 이들이 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느끼는 팬들은 여전히 잠실운동장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서울 잠실=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