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지주 적폐 청산 드라이브에 “신(新) 관치 금융” 반발
금융감독원은 지난 19일 직접 압수수색에 준하는 방식으로 각 은행의 채용 DB(데이터베이스), 임원 이메일 등을 확보했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금감원이 이처럼 연말 고강도 검사를 벌인 전례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종현 기자
지난 19일 금감원은 시중 11개 은행을 상대로 금융권 채용비리 의혹에 대한 특별 현장 검사에 착수했다. 4대 은행 가운데는 신한·국민·하나은행이 포함됐고, 농협과 수협, 부산은행 등도 검사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은행은 이미 16건의 채용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 검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일 공공기관 채용비리에 대해 “민형사상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공공기관과 금융기관부터 채용 비리를 근절하고, 민간기업까지 (조사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청와대는 즉각 채용 비리 전수조사가 진행 중인 공공기관 외에 민간영역인 금융권을 상대로 실태 파악에 나섰다.
금융기관 검사권을 가진 금감원은 ‘바통’을 넘겨받았다. 금감원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최근 금감원이 내부 비리로 수차례 홍역을 치른 만큼 정권의 눈치를 당분간 볼 수밖에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그러나 금감원 채용 비리 조사에 응한 시중은행들은 ‘내부 확인 결과 채용 비리는 없었다’는 취지로 회신했다. 이는 정부가 공공기관 채용 비리 실태를 전수조사한 결과 모두 143건의 채용 비리를 적발한 것과 대비됐다. 앞의 인사는 “우리은행에서만 16건의 채용 비리가 발견됐는데 다른 은행은 단 한 건도 없다는 결과를 (청와대가) 과연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직접 압수수색에 준하는 방식으로 각 은행의 채용 DB(데이터베이스), 임원 이메일 등을 확보했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금감원이 이처럼 연말 고강도 검사를 벌인 전례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금감원 안팎에선 지난 10여 년간 사회 고위층 전·현직 자녀가 금융사에 대거 취업했고, 인사상 혜택을 입었다는 말도 나온다. 4대 은행 한 관계자는 “비교적 최근까지 금융권이 ‘금수저’ 출신을 선호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해선 안 된다”며 “내부 인사에도 부모 후광이 일정 부분 영향을 줬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이번 검사 결과 채용 비리에 연루된 실무자, 간부, 임원이 확인되면 검찰에 일괄 고발할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에선 금감원의 이번 고강도 검사와 각 은행 수장의 거취를 연결 짓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채용 비리 의혹에 연루된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검찰 수사에 앞서 자진 사퇴를 선택했다. 만약 다른 은행에서도 채용 비리 정황이 포착되면 이 전 행장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또 다른 4대 은행 한 간부는 “사실상 자리를 비워달라는 신호 아니겠느냐”며 말을 아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최근 잇따라 금융권 최고경영자(CEO)의 연임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폐쇄적인 금융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미 연임이 확정된 KB금융지주뿐 아니라 하나금융지주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회장 선임 과정을 점검하겠다고 공언했다. 일요신문DB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공기업 수장을 부당한 방법으로 교체하거나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피력했다. 그러나 금융권은 사정이 다르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번 금감원 검사에서 보듯 정부 차원의 압박이 시중은행에 여러 경로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은행은 이 전 행장 사퇴 전후 출처불명의 ‘부외자금설’에 휩싸였다. 우리은행 안팎에선 이 전 행장이 지난 정부 대표 금융인맥인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출신이기 때문에 현 정부 실세에 찍혔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 과정에서 이 전 행장은 서금회임에도 정권교체 후 ‘자신은 서금회가 아니었다’고 항변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른 4대 금융사 수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 자신에 대한 청와대 내 평판을 비밀리에 수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금융사는 정권교체 후 끊임없는 사정설에 휩싸였는데 수장 스스로 자신의 결백함을 주변에 토로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최근 위기설에 휩싸인 4대 금융사 수장도 대통령 해외 순방 때마다 얼굴을 비추기 위해 물밑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교롭게도 이들 금융사를 주축으로 한 현 금융권 주류 세력은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관치’ 논란을 제기했다. 한쪽으로는 청와대와 접촉을 시도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관치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그동안 금융권 고위인사끼리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적폐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며 “잘못된 부분은 민간금융사라 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현재 분위기”라고 전했다.
실제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최근 잇달아 금융권 최고경영자(CEO)의 연임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폐쇄적인 금융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미 연임이 확정된 KB금융지주뿐 아니라 하나금융지주에 대해서도 예외없이 회장 선임 과정을 점검하겠다고 공언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관치 논란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미 금감원은 최흥식 금융감독원장 지시로 금융사 회장 승계 프로그램에 대한 검사에 착수했다.
이에 대응해 하나금융 등 금융사는 회장 선정 과정을 자체 개편하겠다는 의사를 대내외에 밝혔다. 그러나 금융권의 ‘낡은 판’을 바꾸겠다는 청와대, 금융위, 금감원의 공세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4대 은행 또 다른 관계자는 “역대 어느 정부도 주요 금융사를 그냥 놔두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