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아마 한데 모여 ‘격렬히 신년인사’
26년째 압구정동에서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시영 원장. 바둑 실력으로나 인품으로나 아마바둑의 큰 자산이다.
1월 초 압구정기원 장시영 원장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7일 날 바둑대회 있는 거 알지? 어떻게, 한번 구경올텨?” 압구정기원이 바둑인들의 양산박이자 해방구라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들어오던 터. 마다할 이유가 없어 7일 오전 압구정기원으로 향했다.
압구정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보이는 빨간색 벽돌건물 4층에 압구정기원이 보인다. 이곳 장시영 원장은 프로와 아마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바둑 애호가로 꼽힌다. 그는 인터넷 대국수만 5만 판을 헤아릴 정도의 바둑광이고, 바둑대회가 열린다하면 전국 어디든 불원천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바둑 하는 사람은 늘 바둑을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그래서인지 그가 운영하는 압구정기원에서는 1년 내내 바둑대회가 열린다.
이날의 대회는 2018 압구정 신년 바둑최강전. 기원에서 열리는 대회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 평소 ‘아마바둑의 메카’라 불리는 곳답게 내로라하는 전국의 맹장들이 모였다.
아마랭킹 1위 조민수가 보이고 그와 1위 자리를 다투는 최호철의 모습도 보인다. 거기에 전국구 멤버인 김정우, 서부길, 양덕주, 김우영, 조병철, 김종민, 이정권도 출전했다. 그뿐 아니다. 차은혜, 홍준리, 김봄 등 현 내셔널리그 여자선수들도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바둑의 메카 소릴 듣기 부족하다.
전 프로기사 김희중과 현직 프로기사 김일환 9단, 김종수 9단도 선수로 참가했다. 또 얼마 전 입단한 박지영도 합류했다. 여기에 심판은 정대상 9단. 그야말로 온갖 바둑인들이 총출동했다 할 수 있는데 이들에 도전장을 내민 노근수, 이재철, 양세모, 원종근, 허정식, 노상호, 김동수, 김솔빈 등이 넓지 않은 기원을 꽉 메웠다.
평소 고향 순천에서 서울에 올 때마다 꼭 이곳에 들른다는 조민수 7단은 “오늘은 바둑인들끼리 새해 인사도 나누고 친목도 도모하는 자리”라면서 대회를 후원한 (주)눈꽃비 한윤용 대표와 압구정 여류최강전을 후원한 (주)루튼의 오병훈 대표를 소개한다. 바둑대회를 후원할 정도니 당연히 기력도 낮지 않아서 오병훈 대표는 석점 칫수의 선수로 대회에 참가했다.
올해 첫번째 아마바둑대회는 압구정기원에서 열렸다.
아, 프로와 아마의 칫수는 아마인 흑 2집반 공제의 칫수로 진행했다. 지난해 어느 대회들은 프로와 아마가 전면 호선으로 붙어 양쪽에서 빈축을 사기도 했는데 압구정 신년 바둑최강전은 절묘한 지점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4인 단체전, 3라운드를 치러 가장 많은 승수를 올린 팀에게 주어지는 우승의 영광은 김희중, 조병철, 이정권, 허정식으로 구성된 임팔라 팀이 안았다. 임팔라는 최종전에서 BTS(박윤서, 채영석, 김종민, 신광승) 팀을 꺾고 3전 전승을 거뒀다. 우승상금은 140만 원. 준우승은 92만 원이고 꼴찌인 8위에게도 20만 원이 주어졌다. 4인이 나눠 갖는 상금이므로 크지 않은 돈이지만 후원하는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또 적은 금액도 아니다.
압구정기원이 바둑인들의 메카요, 양산박이라 불리는 것은 이런 크고 작은 바둑대회들이 1년 내내 쉴 틈 없이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 초 열릴 예정인 ‘압구정 여류 아마최강전’은 아마추어 여자 선수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대회다. 8회째가 될 압구정 여류 아마최강전은 그동안 김다영, 김경은 등 여자 프로기사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고 가장 최근에 입단한 박지영 초단도 이 대회가 낳은 수확이다.
박 초단은 “지난 10여 년간 압구정기원에서 1년 내내 열리는 압구정 바둑최강전 리그에서 아마 정상급 사범님들과 숱한 대국을 통해 부족한 실전경험을 쌓았다. 나이가 차 연구생을 나오면 가장 문제인 것이 실전 경험을 쌓을 곳이 마땅치 않아지는 것인데 이곳에서의 경험치가 늦은 내 입단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바둑대회라고 해서 승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조민수 아마7단(오른쪽)이 얼마 전 여자입단대회 관문을 뚫은 박지영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다.
또 얼마 전 여류 기성전 우승을 차지한 김다영 2단도 “입단 직전 1년간 아마추어 시니어 사범님들과 정말 치열하게 실전감각을 단련했던 곳이다. 장시영 원장님과 뒤에서 대회를 후원해 주신 많은 후원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장시영 압구정기원 원장은 “임대료가 비싼 지역이라 기원 운영에 어려움이 있지만 지난 26년간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바둑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라면서 “다행히 많은 선후배 바둑인들이 잊지 않고 찾아와 주고 오인섭 전북바둑협회 회장님, 오병훈 회장님, 한윤용 대표님과 같은 아마추어 바둑을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계셨기에 버틸 수 있었다. 바둑인들에게 계속 사랑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알파고 등장 이후 바둑의 패러다임은 급속히 바뀌었다. 알파고 이후 바둑은 승리를 탐하는 승부로서의 가치는 급속히 추락했다. 이제 바둑을 즐기는 이는 문화적 가치로서의 바둑이 주는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바둑인들이 끊임없이 모이는 압구정기원 같은 곳이 바둑문화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