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정주영 어디 없소” 서로 눈치만
단기간에 남북 경협이 정상화될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은 것으로 전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독자적으로 대북제재를 완화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사진=청와대공동취재단
앞서 북한은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대북제재를 결의하고, 국제사회가 모든 교역을 중단하면서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고위급회담 배경에 경제문제가 있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이유다. 자연스레 관심은 앞으로 남북 경협을 누가 주도하고, 어떤 방식으로 전개할 것인지에 쏠린다. 북한이 남한에 손을 내민 배경에 경제문제가 있다면 우리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그에 상응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1988년 이른바 ‘7·7선언’ 당시와 현 상황을 비교하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과 관계를 ‘적대적 관계’에서 ‘동반자적 관계’로 전환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문재인 정부 역시 이번 동계올림픽을 지렛대로 북한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또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맞물려 문재인 정부는 ‘동북아 동반 번영론’을 외교 부문 아젠다로 설정하고, 북핵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을 꿈꾸고 있다.
재계에서는 정부의 이 같은 대북 정책에 대해 일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복수의 재계 관계자는 “향후 남북 경협에서 정부뿐 아니라 대기업의 역할도 있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4대 기업 한 관계자는 “BH(청와대) 측에서 남북 경협에 큰 기대를 갖고 있더라”라며 “벌써 ‘윗선’끼리 대화가 오간 것으로 아는데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윤을 내야 하는 기업으로선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공약하고, ‘동해권 벨트’ 등 민간부문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사업을 국정 운영 과제로 제시했다. 공교롭게도 노태우 정부 당시 남북 경협의 선봉에 섰던 기업은 대다수가 재벌·대기업이었다. 1990년 발족한 ‘남북교역 민간추진협의회’에는 삼성물산, 대우, 럭키금성상사(LG), 선경(SK) 등이 포함됐다. 재계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도 남북교류 활성화에 적극적이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1993년 대우가 북한 남포공단에서 셔츠, 가방 등을 직접 생산하는 대북사업을 처음 승인받자 삼성, LG 등 대기업 계열 제조사도 투자에 나섰다. 남북은 1994년 제1차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경제인사 방북 및 위탁가공교역 기술자 방북 허용 등)를 발표했고, 1998년에는 제2차 남북 경협 활성화 조치(위탁가공교역을 위한 생산설비 반출제한 폐지, 협력사업 투자규모 제한 폐지 등)를 추가 발표했다. 또 김대중 정부 들어 추진된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사업, 경공업 원자재 제공 및 지하자원 개발 협력사업 등은 모두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염두에 둔 ‘민관 합작 프로젝트’였다.
무엇보다 남북교류 초기인 1980년대 정치권과 마찰로 대북 투자에 미온적이던 현대그룹은 1997년 김대중정부가 들어서자 강한 대북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북 실향민 출신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이른바 ‘소떼 방문’은 국내외는 물론 북한 최고지도부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이후 현대그룹을 중심으로 남북 경협은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통일부 남북교류협력 통계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 724만 달러였던 남북 교역액은 2007년 1798만 달러까지 급등했다. 재계 관계자는 “(‘햇볕정책’의 계승자인)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 ‘제2의 정주영’을 찾는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6월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소떼몰이 방북 환영식. 현대아산 홈페이지 캡처.
현재 북한에서 유일하게 금강산 개발 사업권을 인가받은 기업은 현대그룹이다. 정주영 명예회장 타계 후 현대차그룹과 분리된 현대그룹은 명예회장의 유훈을 이어받아 대북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아산이 북측과 맺은 7가지 장기 사업권이 있지만 대북제재가 풀리지 않아 섣불리 사업 재개를 논하기 어렵다”라며 “대북사업은 기업 이익 측면에서 접근하면 안 되고, 민족의 중장기적인 발전과 남북 경제 공동 번영이란 가치에 투자해야 한다. 국내 여러 대기업이 대북 사업을 한다, 안한다 말이 많았지만 실행력과 결단력이 없으면 대북사업을 결코 성공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재계 안팎에선 문재인 정부가 현대그룹 외에 또 다른 사업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최근 몇 년간 구조조정을 겪은 현대그룹만으로는 대규모 투자 여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현 정부와 친분설이 돌았던 A 사의 경우 대북사업을 놓고 정부 고위직과 접촉했으며, 먼저 중국사업을 성공시킨 후 자연스레 대북사업까지 확장하는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A 사 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 같은 소문은 엉뚱하게도 다른 대기업에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앞의 4대 기업 관계자는 “A 사도 한다는데 우리도 정부 기조에 맞춰 뭔가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함이 (수뇌부들 사이에)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4대 기업 관계자는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업 파트너인데 어떤 대기업이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과감히 투자할 수 있겠느냐”라며 “남북 경협은 비즈니스가 아닌 정치적 이벤트인데, 정부가 재계에 동참을 요구하면 마지못해 따라가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로서도 딜레마다. 최근 재계는 권력기관을 통한 ‘경제 민주화’ 압박에 적잖은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 박근혜 정부 당시 대기업의 재단 출연이 문제가 된 것을 고려하면 무리한 대북사업 동원은 ‘역풍’이 돼 돌아올 수 있다. 북한과 거래는 주로 현금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사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과거 대북사업에 투자했던 한 대기업의 간부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의 저렴한 인건비, 토지 임대료 등에 대한 메리트를 느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며 “이번에 남북 경협이 재개된다고 하더라도 투자할 기업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단기간에 남북 경협이 정상화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은 것으로 전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기자간담회에서 “독자적으로 대북제재를 완화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유엔 제재가 유효한 이상 남측 기업의 대북 사업은 원천 금지될 수밖에 없다. 남측이 북측에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것 또한 유엔 제재에 위배될 소지가 크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금방 풀릴 일이 아닌 것 같다”라며 “국제 역학관계와 국내 사정 등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남북 경협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